[fn시론]건강보험 기금화 ‘감춰진 의도’/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

안만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5.03.08 12:44

수정 2014.11.07 20:41



2004년 예산처 ‘기금존치평가보고서’는 건강보험기금화를 제안하고 있다. 건강보험은 ‘설치 목적이 한정적이고 수익자부담 재원에 의하며 예산보다 신축적 운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금운용의 기본원칙’에 부합하다는 점이 그 논거로 제시됐다.

이와 거의 같은 시점에 국회 예산정책처는 4대 사회보험(건강보험 외에 국민연금, 산재보험, 고용보험) 중 건강보험만이 기금이 아니며 국회의 재정통제권이 미치지 못한다고 하고 있다. 언뜻 보면 건보가 마치 국회나 정부의 감독을 받지 않고 자의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논리의 견강부회가 쉽게 간파된다.

‘기금운용의 기본원칙’ 세 가지 모두 정부예산과 비교한 기금의 특성으로 거론되는 것인데 거꾸로 건강보험의 기금화 논리에 사용되고 있다.
정부예산은 국민의 혈세를 재원으로 하므로 국회가 정한 대로 엄격하고 투명한 자금집행이 요구된다. 반면 집행의 신축성이 요구되는 사업은 기금으로 운영할 수 있다. 현행 건보의 지출은 예산은 물론 기금보다 더 신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의료비 발생 자체가 불확실성이 크고 지출이 사후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건강보험은 ‘신축적’ 운용이 필요하므로 지금보다 ‘경직적’인 기금으로 만들자는 앞뒤 전도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꼴이 된다. 우리와 같은 사회보험방식을 취하고 있는 독일, 일본, 대만 어디를 보아도 건강보험을 정부 관장 기금으로 흡수해 운영하는 나라는 없다. 영국의 NHS처럼 아예 정부가 의료의 공급과 재원조달 모든 것을 책임질 각오가 있다면 기금이 아니라 아예 정부예산으로 운영하면 된다. 그러나 현재 연간 국민의료비 40조원 중 정부예산 투입은 건강보험과 의료급여(보호) 통틀어 10% 남짓이다.

이러한 기금화는 결국 재정당국의 건강보험제도에 대한 입김 강화만을 결과할 것이다. 필요 이상의 외부간섭이 가입자, 보험자, 공급자의 합의구조 속에서 운영돼야 할 건강보험제도를 옥죄어 왔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국민연금과 고용보험은 미래 시점의 소요자금을 일정 기간 적립한 보험원리금을 재원으로 충당하는 적립방식(fund)의 장기보험이다.

반면 건강보험과 산재보험은 그 때마다 재원을 마련해 충당하는 소위 부과방식(pay-as-you-go)의 단기보험이다. 건강보험, 산재보험 모두 기금 방식이 맞지 않는다. 단기적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금 정도를 보유하게 되고 그나마 준비금은커녕 몇 년 동안 차입운영을 해온 건강보험에서 기금화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산재보험은 대상자가 국한돼있고 대상 질환도 한정돼 있어 그나마 공공기금 관리방식을 적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체 국민, 만성질환에서부터 응급환자 그리고 감기에서부터 중증 암질환까지의 다양한 리스크구조, 공급자의 유인수요까지 결합해 시현되는 지출을 정부가 1년 전에 정한 지출운용계획에 따라 집행하라는 것은 무리다. 최소한 현행 사후적 보상방식이 유지되는 한 그렇다.

기금화 여부는 결국 투명성 제고의 편익과 신축성 상실의 비용을 비교 형량해 결정할 일이다. 지출 규모가 유동적인 상황에서 수지상등의 원칙을 지키려면 그만큼 건보재정의 운영에 신축성이 있어야 한다. 몇 단계에 걸치는 옥상옥 심의와 승인절차 하의 정부기금에서는 이러한 신축성이 제약된다. 반면, 이미 자세히 공개되어 있는 건보의 재원 및 급여지출 내역은 꼼꼼히 관찰, 분석, 비평되고 있다. 복지 예산 전체를 다루고 있는, 너무도 바쁜 한두 명의 예산처 공무원이 기존의 일에 추가해 건강보험기금 업무마저 관장하게 된다고 해서 건강보험의 운영이 지금보다 더 투명해 질 것 같지는 않다.

건보제도는 보험료, 보험수가 등 하나하나의 현안마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고 정치화, 사회이슈화돼 있다. 보험 혜택의 확대가 명제로 돼 있는데도 이를 위한 보험료 인상은 지극히 어려운 정치과정이 됐으며 매년 반복되는 수가 협상은 싸움터를 방불케 한다.


이러한 건강보험을 정부가 기금으로 관장하는 순간, 정부는 재원조달의 무거운 책무를 지게 되고 수가 싸움의 당사자로 매우 제한된 입지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러한 자승자박적 전환을 제안하고 있을까. 보고서가 ‘건강증진기금을 신설될 건강보험기금에 흡수’한다고 슬며시 언급하고 있는 것에서 그 감춰진 의도가 드러난다.
담배세 인상으로 확대일로에 있는 건강증진기금을 건보재원으로 제약 없이 사용함으로써 정부예산의 부담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