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특별기고

[특별기고]복지국가 위한 정부의 역할/안승호 숭실대 경영학부 교수

홍창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5.12.07 13:55

수정 2014.11.07 11:42



해외 여행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선진국의 도시 곳곳에는 체육시설, 공원시설, 그 밖에 시민을 위한 수많은 여가 관련 공공시설이 있는 것을 알 것이다. 부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혹자는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 땅 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만 이와 같은 공공시설들이 들어설 수 있다고 치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 파리, 일본의 도쿄, 벨기에의 브뤼셀, 중국의 상하이 등 비교적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에서도 규모는 작을지 몰라도 수많은 시민이 이용할 수 있는 충분한 공공 여가시설이 들어서 있다. 이러한 공공 여가시설의 사회?경제적 영향은 단지 보기 좋은 도시 건설이나 녹지 확보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다. 저렴한 여가시설의 확대는 사회적 긴장감을 완화시키며 국민 건강을 증진하고 이혼율을 줄일 뿐 아니라 부의 분배를 촉진하는 등 복지국가의 개인적 의미를 실현하도록 도와준다.

예를 들어 보자. 미국에서 1주일에 두번 테니스를 하고 한번쯤 골프장에 나가고 네 식구가 공원 같은 좋은 분위기에서 배 부르게 갈비를 구워 먹는다면 얼마쯤 돈이 들까. 물론 도시마다 다르겠지만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보스턴 등의 거대 도시를 제외하고는 아마도 100달러 내지 150달러 정도면 족할 것이다.
즉, 우리나라 돈으로 10만원에서 15만원 안팎이면 이같은 일을 할 수 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같은 라이프 스타일을 즐기려면 적어도 40만원에서 50만원 정도의 지출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똑같은 형태의 여가 생활을 즐기면서 어림잡아 30만원의 정도의 차가 생기고 한달이면 120만원, 1년이면 1440만원의 차가 난다. 만약 우리나라에서도 미국과 같이 저렴한 여가 기회가 제공된다면 여가 활동을 위한 1440만원의 추가 소득은 필수적이지 않다. 궁극적으로 돈이라는 자원은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사용될 때 그 가치가 발휘되는 것이고 여가 생활이야 말로 행복 추구에 필수적인 요소라 말할 수 있다. 결국 저렴한 여가 기회가 제공될 수 있다면 수입 확대를 위한 비정상적인 행위, 예컨대 부정부패, 건강을 훼손하고 가족과의 관계를 희생하는 노동시간의 연장, 더 나아가 임금 협상을 위한 극렬한 투쟁마저도 사라질 수 있다고 본다. 한마디로 행복을 위해 돈을 더 벌려는 동기를 약화시킨다.

흔히 주 5일제 근무제도가 정착됨으로써 우리나라 시민들도 높은 삶의 질을 향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주 5일제 근무제도가 정착됨에 따라 근로시간은 감소하고 소득도 감소할 것이다. 이에 대한 근로자의 대책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줄어든 소득을 만회하기 위해 두번째 직업을 갖는 것이며 다른 대응은 남는 시간에 집에만 있는 것이다. 물론 가족과 집에만 있어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겠지만 서로 ‘붙어’ 있다가보면 갈등도 생기고 부부싸움도 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가 발생하면 이혼율도 증가하고 에버랜드에 가자는 아이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질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독일의 주 5일제 근무제 실시와 이에 따른 이혼율 증가에 대해 주목해야 할 것이다. 훌륭하고 저렴한 여가 기회가 제공되지 않는다면 주 5일제 근무제의 도입에 따라 여유로운 생활보다는 오히려 갈등이 많아지는 생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품질, 저가의 여가 시설의 확대는 부의 자연스러운 분배에도 크게 기여한다.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 부자로부터 세금을 더 거둬 이를 저소득층의 생활 보조에 활용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특정 개인에게만 혜택이 돌아간다. 반면 여가 시설의 확대는 특정 개인이 아닌 모든 시민들의 혜택으로 돌아가며 한번 구축된 시설은 장기간 활용됨으로써 일회성 분배가 아닌 영원한 부의 분배가 달성될 수 있다.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정부의 역할은 이제 분명하다. 다양한 고품질의 여가 시설을 확충하고 이를 저렴하게 제공하는 일이다. 서울의 부지가 부족하다면 서울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북한산을 활용하는 것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 무조건적인 자연 보호가 유일한 대책이 아니다. 왜 북한산이, 그 곳 절에 기거하는 스님들과 그리고 건강한 사람들만의 강도 높은 수련 장소로 남아 있어야만 하는가. 북한산이 서울 녹지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면 북한산의 활용 범위는 크게 확대될 필요가 있다. 등산로가 있다면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산책로도 있어야 하고 잡상인의 간섭 없이 정막함도 즐길 수 있어야 하며 장사하는 사람 눈치도 살필 것 없이 갈비도 구워 먹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구청이나 군 단위의 문화 및 체육 센터는 동 단위의 문화 및 체육 센터로 확대돼야 한다. 예산이 남아 보도블록을 새로 교체하는 것보다 센터의 벽돌을 하나라도 쌓는 정성이 필요하다.
보조금이라도 줘서 개인들이 운영하는 테니스장의 개설도 유도하고 무엇보다도 국가 소유의 땅을 개인에게 매각하기보다는 여가 시설의 부지로 개발하는 것을 우선으로 고려하는 행정 절차도 구축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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