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칼럼]

‘관습헌법’된 예산안 늑장처리/곽인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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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면 국회에서 난리를 치다가 해가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듯 쏙 들어가는게 하나 있다. 한해 나라 살림을 꾸려갈 예산안의 늑장 통과 문제다. 이 고질병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데까지 왔다. 뒤늦은 감이 있으나 차분하게 되돌아 볼 때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준법성이 형편없는 거야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렇지만 다른 법도 아닌 헌법을 버젓이 어기는 행위가 상습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번거롭지만 헌법을 들춰보자. 제54조 2항은 “정부는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이를 의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2월2일까지 의결하란 말이다.

올해 예산안은 지난해 12월30일 통과됐다. 헌법 시한보다 28일이나 늦었다. 참여정부 출범 첫해인 2003년에는 12월30일, 2004년엔 12월31일 각각 통과됐다. 아슬아슬해서 손에 땀이 다 날 지경이다.

예산안 의결 시한을 헌법으로 못박은 데는 이유가 있다. 통과 후 한달가량은 여유를 줘야 실제 돈을 쓸 지방자치단체·교육단체 등이 차분히 1년치 집행계획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의결이 늦어지면 계획도 서둘러 짜야하고 덩달아 집행도 허술해진다.

변양균 기획예산처 장관은 지난해 의원들에게 예산안의 법정 시한 내 통과를 요청하는 e메일을 보냈다. 부처 간부들은 ‘괘씸죄’에 걸리지나 않을까 만류했지만 변장관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다. 결과는 역시나 쇠귀에 경 읽기. 몇몇 의원들은 “지난해에도 시한을 넘기지 않았느냐”면서 왜 새삼 문제를 삼느냐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또 일부는 “헌법에 그런 조항이 있느냐”고 되묻기도 했다니 말문이 막힐 뿐이다.

예산안이 법정 시한 내 통과되지 않으면 준(準)예산 제도를 활용하면 될 거 아니냐는 반론도 있다. 사실 헌법은 “새로운 회계연도가 개시될 때까지 예산안이 의결되지 못한 때”에 일부 항목에 대해 “전년도 예산에 준하여 집행”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54조 3항).

그러나 기획예산처는 준예산을 통한 예산 집행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지난 1960년 의원내각제를 도입하면서 신설된 준예산 조항은 내각 총사퇴 또는 의회 해산에 대비해서 만든 조항이라는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 의회 해산 규정이 사라진 현행 헌법에도 이 조항이 살아 있다. 또 준예산 제도를 활용하려면 하위법인 예산회계법에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담겨야 한다. 그러나 예산회계법은 헌법 조항을 단순 반복하는데 그치고 있다. 물론 실제 준예산을 활용한 적도 없다.

예산안 늑장 통과는 참여정부만 지탄받을 일이 아니다. 서슬 퍼렇던 박정희-전두환 대통령 시절엔 꼬박꼬박 시한을 지켰으나 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 악습이 나타나더니 지금의 ‘관습헌법’으로 자리잡았다.

다만 예산안 통과 날짜만 보면 노무현 대통령 시절의 긴장도가 가장 높다. 그 이전엔 DJ 시절 12월27일(2000·2001년)이 가장 빠듯했다. 참여정부 들어 이 기록을 3년 연속 깨뜨리고 있다. 야구로 치면 9회말 투아웃에 투스트라이크 스리볼을 꽉 채워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예산안을 11월에 통과시킨 뜻밖의 기록도 있다. 92년, 97년, 2002년에 5년 간격으로 그런 일이 있었다. 바로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장관이 e메일을 보내 ‘우는 소리’를 하지 않아도 일사천리로 통과시킨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졸속 처리는 불을 보듯 뻔하다.

상습적으로 헌법을 지키지 않을 거면 아예 그 조항을 바꾸는 게 옳다. 언제가 됐든 개헌 논의가 본격화할 때 예산안 통과시한과 준예산 조항을 손질할 필요가 있다.

연말이면 여기저기서 보도블록을 파헤쳐 길이 어지럽다. “이 짓들 또 하는구먼”하고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멀쩡한 보도블록 속에 내가 낸 세금이 들어 있다.
연말에 집중되는 세금 낭비는 애초 집행계획이 허술하게 짜인데도 일정 부분 원인이 있다. 물론 근본 원인은 국회의 늑장 처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민이 땀 흘려서 낸 돈을 이렇게 소홀히 취급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그것도 “선진국이 아니라는 증거를 대보라”고 들이대는 나라에서 말이다.

/ paul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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