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칼럼]신상훈과 황영기/이장규 금융부장

이장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6.01.16 14:16

수정 2014.11.07 00:33



금융계의 라이벌로 일컬어지는 신상훈 신한은행장과 황영기 우리은행장은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신행장은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조직’인 신한은행의 문화에 걸맞게 평범한 은행원에서 출발, 비범한 최고경영자(CEO)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한번 만난 사람은 반드시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온화한 카리스마를 지닌 그는 일본 오사카 지점장 시절에는 야쿠자와 맞서 연체 채권을 받아낸 일화가 있을 정도로 뚝심도 두둑하다.

황행장은 엘리트 코스를 밟은 쾌도난마형 CEO다. 화술에 막힘이 없고 머리가 비상하며 시장을 읽는 통찰력이 대단하다. 삼성그룹의 돈 관리를 책임지고 한때 이건희 회장의 통역을 도맡았을 정도로 외국어 능력도 뛰어나다.
그는 삼성증권 사장시절 브로키지(주식위탁매매 수수료) 위주의 천수답 경영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증권영업을 웰스매니지먼트(자산관리) 체제로 천지개벽시켰다.

두 은행장이 지난주말 비슷한 시기에 경영전략 회의를 소집, 올해 경영 화두를 던졌다.

신행장의 화두는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것’. 여류 탐험가 한비야의 책에서 따온 말이지만 미국 시인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이 연상되기도 한다. ‘단풍진 숲 속에 두갈래 길/두 길을 갈 수 없어 안타까웠네//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네.’

‘가지 않는 길’이나 ‘지도 밖 행군’은 프런티어 정신을 예찬하며 파괴적 혁신을 지향한다. 파괴적 혁신은 수익적인 측면에서 별로 매력이 없어 기존의 경쟁자들이 무시하거나 멀리하는 시장에 초점을 맞춘다. 성과도 초기엔 아주 보잘 것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런 미미한 성과는 귀중한 교두보를 제공해주고 기존의 시장 리더를 따라잡는 기반이 된다.

신한의 성장사는 파괴적 혁신으로 점철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상-제-한-서’의 5개 대형 은행이 금융시장을 장악할 때 신한은 ‘길거리 캠페인, 창구 인사하기’로부터 시작해 중소기업-가계금융 등 당시엔 보잘 것 없던 부분부터 하나씩 장악해왔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신행장의 경영관은 지난 80년대 중반 자동차나 선박, 가전을 택하지 않고 인터넷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라우터(인터넷연결장치)를 개발한 스탠퍼드 출신의 두 학생(시스코 창업자)과 흡사하다.

황행장은 ‘장산곶 매 론(論)’을 내세웠다. 장산곶 매는 40년을 살고 몸이 무거워지면 돌에 부리를 쪼아 새 부리가 나게 하고 그 부리로 발톱과 깃털을 뽑아내어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한 뒤 창공을 차고 올라가 30년을 더 산다는 새다. 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혁신이다. 오늘의 성공에 안주하면 내일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그의 철학이 담겨있다.

매는 사냥할 때 지상에 있는 사냥감을 향해 곧바로 직진하지 않는다. 하늘을 맴돌다가 목표물이 포착되면 먼저 수직에 가까운 하강 운동을 통해 중력가속도(에너지)를 최대한 흡수한 후 시속 320㎞의 고속으로 수평이동하면서 먹이를 낚아챈다. 우회하는 듯 하지만 가로지르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하다. 우회 곡선을 따라 에너지를 축적하는 것을 물리학에선 우회 축적의 원리라고 부른다.

우리은행의 전신은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다. 외환위기로 이들 은행은 한때 거덜났고 공적자금도 받았다. 직선으로 반듯하게 오지 못했다. 그러나 사냥하는 매처럼 우회 축적을 통해 에너지를 흡수했다. 지금은 먹이를 낚아채기 직전의 상태처럼 에너지가 넘친다. 황행장이 제기하는 토종 은행론은 새로 쪼아낸 부리와 같다. 그러면서도 황행장은 기본적으로 ‘존속적 혁신’을 추구한다. 지금껏 축적해 온 핵심 역랑에 집중하고 오늘의 경쟁 우위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런 두 은행이 지독한 라이벌이 됐다. 행장간의 경쟁의식은 더욱 깊다. 연초부터 감정 싸움이다 싶을 정도로 격한 말들이 오고 가기도 했고 일부 언론의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경쟁은 바람직하다. 비슷한 경영?영업전략과 상품구성 탓에 ‘양떼 근성’이 있다고 질타당한 은행권이 아니던가. 경쟁하며 서로 다른 길을 찾아가는 과정은 아름답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 한국의 은행은 ‘그 나물에 그 밥’이란 비아냥을 피할 수 있고 월드클래스 급의 우량 은행으로 재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두 은행의 라이벌 의식이 가장 첨예하게 맞부딪치는 곳은 또 있다.
바로 농구장. 지난해 겨울리그 우승과 여름리그 우승을 나눠 가진 두 은행은 올 겨울리그에서도 1, 2위를 다투며 박빙의 승부를 펼치고 있다. 5명이 뛰는 여자농구도 혹독한 훈련과 개인 전술, 허를 찌르는 작전과 조직력, 용병술이 어우러져 승부의 세계를 빚어내는데 1만여명의 오늘과 내일이 걸린 은행대전은 오죽하랴.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임직원들에게 농구는 이미 스포츠가 아니라 은행의 미래가 아닌가 싶다.


신상훈과 황영기. 두 행장에게 상대방은 끊임없이 자기를 깨우치게 하고 맘을 다잡게 하는 자극제이자 동지가 아닌가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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