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칼럼]호세 피녜라와 유시민/곽인찬 논설위원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6.02.07 14:20

수정 2014.11.07 00:09



이런 연금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먼저 매달 소득에서 10%를 뗀다. 소득공제 혜택을 받는 이 돈은 뮤추얼펀드를 굴리는 자산운용사에 맡겨진다. 운용사 선택은 돈 낸 사람 마음이다. 뮤추얼펀드가 주식과 채권에 투자해 거둔 실적에 따라 나중에 받는 연금액이 달라질 수 있다. 물론 펀드 수익은 비과세다. 행여 돈을 까먹을 위험을 줄이기 위해 정부가 엄격한 투자운용 지침을 적용하고 포트폴리오 구성도 제한한다.
자산운용사가 망해도 펀드 자산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펀드와 운용사를 별개 회사로 운영한다.

연금을 언제부터, 얼마씩 받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납부자의 뜻에 달려 있다. 일찍 은퇴해 여행이나 즐기겠다는 사람은 연금을 빨리 타도록 프로그램을 짜면 된다. 50대에 은퇴한 뒤 맨송맨송 65세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컴퓨터에 원하는 연금 수령 시기와 액수를 적어넣으면 지금 월급에서 떼야 할 금액을 알 수 있다. 이러니 연금 낼 때마다 얼굴을 찡그릴 일도 없다. 한마디로 개인 맞춤형 연금이라고 부를 만하다.

세대간 갈등도 없다. 젊은 세대가 나이든 세대를 부양하는 방식이 아니라 철저히 내가 낸 돈을 굴려서 되돌려 받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강제 징수식 국민연금 제도를 이렇게 바꾸니 뜻밖의 부수 효과가 따라왔다. 막대한 투자 재원이 저절로 형성됐고 이는 성장을 뒷받침했다. 국민 대다수가 주요 기업의 주주가 되면서 경제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당장 내 돈이 들어간 뮤추얼펀드가 더 큰 수익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경제를 망치는 행위는 ‘공공의 적’이 됐다. 연금의 탈 정치화도 이뤄졌다. 정치인들이 표를 의식해 연금을 놓고 서로 핏대를 올리는 일도 사라졌다.

이런 연금제도가 과연 있을까. 있다. 칠레에서 지난 1981년부터 시행 중인 연금저축계좌(PSA·Pension Saving Account) 제도가 이런 방식으로 운영된다. 호세 피녜라 노동·사회보장부 장관이 PSA의 산파 역할을 했다. 그는 지금 국제연금개혁센터(ICPR·International Center for Pension Reform) 소장으로 전 세계 국민연금 개혁의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다.

피녜라의 연금 민영화 개혁은 단순한 진리에서 출발한다. 저출산·고령화가 진행되는 한 아들 세대가 아버지 세대를 먹여 살리는 낡은 방식으로는 국민연금이 파산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돈을 받을 노인들이 돈을 낼 젊은이들보다 많기 때문이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기 위해 피녜라는 자기가 낸만큼 돌려받는, 지극히 합리적인 방식으로 제도를 바꿨다.

처음엔 어려움이 컸다. 기존 가입자들을 PSA 시스템으로 전환하도록 설득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노조도 반대했다. 피녜라는 이미 연금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PSA 도입으로 어떤 영향도 받지 않을 것임을 보장했다. 또 지금 국민연금을 붓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존 제도와 PSA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새 근로자들은 PSA 가입을 의무화했다. 그 결과 지금 칠레 근로자의 대부분은 PSA 가입자들이다. PSA 전환 재원은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정부 예산을 빡빡하게 짜서 마련했다. 또 다른 부수효과다.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가 인사 청문회에서 곤욕을 치렀다. 무엇보다 국민연금 미납이 도마 위에 올랐다. 개혁의 깃발을 흔들기도 전에 김이 샌 꼴이다. 여건은 유내정자에게 절대 불리하다. 자격·자질 시비는 두고두고 그를 괴롭힐 게 틀림없다. 양극화를 해소한다고 온 나라가 증세로 떠들썩한 것도 부담이다. 소득공제는 줄이면서 연금은 더 내라고 했다간 봉급 생활자들이 정말 폭발할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유내정자가 ‘더 내고 덜 받는’ 방식에만 매달린다면 그 구태의연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봤자 기금 고갈 시기만 약간 늦춰질 뿐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발상을 확 바꿔보자. 전 국민의 노후를 반드시 국가가 시시콜콜 책임져야 하는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나라에서 국가의 역할은 아무리 노력해도 살아가기 힘든 일부 계층을 보살피는 데 국한하면 안 되는 걸까. 그 실제 사례를 우리는 칠레에서 본다.
유내정자에게 피녜라 연구를 권한다.

/ paul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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