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칼럼]스크린쿼터와 올리브나무/곽인찬 논설위원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6.02.21 14:21

수정 2014.11.06 23:57



록 음악의 대부 신중현이 영화인들에게 한방 먹였다. 신중현은 “문화는 결국 작품”이라며 “영화인들이 정책(스크린 쿼터)만 가지고 자꾸 시위를 벌이는 건 같은 문화인으로서 보기에 지나친 면이 있다”고 꼬집었다.

사실 이 비슷한 말은 김종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수석대표가 먼저 했다. 김대표는 이달 초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류를 이끌어 낸 한국 가수들이 아리랑이나 도라지만 듣고 컸으면 그런 퍼포먼스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우리나라가 외국 음반에 대해 디스크쿼터 같은 것을 운영한 적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쟁력을 강조한 발언의 취지는 같지만 느껴지는 무게는 다르다. FTA 협상 책임자의 발언은 그러려니 넘길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대중문화 스타인 신중현의 발언은 영화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을 것이다.

유명 스타와 감독들이 거리에서 외치고 있다. 스크린 쿼터 축소는 우리 영화를 죽이는 길이라며 목청을 높이고 있다. 그렇다고 쿼터 축소 결정이 뒤집힐 것 같지는 않다. 목숨을 건 농민들의 시위도 개방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이러다가 영화인들이 농민들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걱정이다. 머지않아 할리우드로 대거 원정 시위를 떠나는 영화인들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자. 홍콩 시위로 농민들은 과연 무엇을 얻었는가. 쌀 한 톨이나마 덜 들여오는 성과라도 있었는가.

세계화의 힘은 그렇게 무섭다. 개방과 경쟁을 특징으로 하는 세계화 시대에는 이쪽과 저쪽이 같이 열어야 한다. 우리는 닫아 걸고 저쪽에만 열라고 고집을 피울 수는 없다.

영화인들은 문화적 다양성을 내세우며 우리 문화 지킴이를 자처하고 나섰다. 스크린 쿼터 반대 시위를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 문화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으로 봐 달라는 거다. 영화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종합예술을 추구하는 영화 한 편에는 우리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러나 할리우드 제작자들에게 영화는 고상한 문화이기에 앞서 돈벌이 산업, 말 그대로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일 뿐이다. 현대자동차 수천, 수만대를 미국에 팔아서 번 돈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한 편이 벌어들일 수 있다.

그렇다고 지레 겁부터 먹을 건 없다. 문을 더 열어도 ‘우리 것’이 살아갈 공간은 있다. 뉴욕타임스지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를 통해 세계화를 역설한 인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나라와 민족마다 독특한 문화가 밴 ‘올리브’ 역시 꿋꿋하게 자랄 것이라고 내다봤다. 덴마크 신문의 만평을 둘러싼 최근의 문명 충돌은 이슬람권에 ‘올리브’가 건재함을 보여준다. 세계화가 아무리 빠르고 넓게 파고들어도 끝내 건드릴 수 없는 민족적 심지가 있는 법이다.

언어는 그 중에서도 가장 단단한 심지다. 외화를 볼 때 답답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자막을 보는 것만으론 성이 차지 않는다. 욕이든 농담이든 아니면 사랑 고백이든 우리말로 듣는 것과 외국어로 듣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이런 갑갑증은 우리 영화만이 풀어줄 수 있다.

영화광은 아니지만 영화를 제법 자주 보는 편이다. 이창동 감독, 설경구 주연의 ‘박하사탕’은 감동 그 자체였다. 최민식이 건달로 나온 ‘파이란’에서 여주인공이 ‘사랑하는 강재씨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를 읽어내려갈 때는 눈 언저리가 푹 젖어들었다. ‘친구’ ‘태극기 휘날리며’ ‘너는 내 운명’ ‘왕의 남자’를 보면서 한국 영화의 저력에 감탄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할리우드에서는 이런 영화를 만들지 못한다. 이웃나라 일본 영화도 우리 시장에선 뚜렷한 한계가 있다. 일본 대중문화에 대해 조심스럽게 빗장을 열었지만 결과는 어떤가. 행여 하늘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하던 우리만 쑥스럽게 됐다.

그러니 영화인들이여, 스크린 쿼터 축소에 당당히 맞서라. ‘쿼터가 없으면 올드 보이도 없다’는 구호는 세계가 인정한 ‘올드 보이’의 작품성을 스스로 모독하는 일이다. 당연 몫인 쿼터는 되레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룹 계열사끼리도 품질이 낮으면 경쟁사 제품을 쓰는 냉엄한 세상이다.
우리 영화니까 더 많이 봐 달라는 ‘국산품 애용’ 호소는 더 이상 심금을 울리지 못한다. 같은 값이라면 관객은 더 나은 영화를 볼 권리가 있다.
누구 말마따나 작품으로 승부하면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

/ paul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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