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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칼럼]퇴직연금,미국이 주는 교훈/곽인찬 논설위원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6.05.02 14:44

수정 2014.11.06 06:38



미국 항공기업체인 보잉에서 20여년 전 있었던 일이다. 회사는 새로 도입된 퇴직연금 제도에 따라 직원들에게 다섯가지 상품을 제시했다. 그러자 특정 3개 상품이 25대 25대 50의 비율로 선택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들 상품이 특별히 인기가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니다. 알고봤더니 직원들은 복잡한 상품 구조 때문에 뭘 골라야 할지 망설였고 결국 최종 선택권은 상품 안내를 맡은 재무담당 직원의 몫이었다. 그는 상품 3개를 골라 25대 25대 50의 비율로 적당히 배분했다.


보잉 직원들의 무지를 비웃을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대기업 직원 아무나 붙들고 퇴직연금 DB와 DC의 차이를 아는지 물어보라. DB는 데이터베이스, DC는 디스카운트의 약자 아니냐는 반문을 듣기 십상일 게다. “그냥 지금처럼 퇴직 때 목돈으로 받겠다”는 사람도 수두룩할 것이다.

좀 쉽게 말해보자. DB(Defined Benefit), 즉 확정급여형은 직원이 받는 퇴직연금이 미리 확정된다. 회사가 주식·채권 등에 퇴직금을 굴려 수익을 내든 손해를 보든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다. 당신은 퇴직 후 미리 정한 연금을 받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회사는 투자 실적에 따라 퇴직연금으로 부담할 돈이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다.

반면 DC(Defined Contribution), 즉 확정기여형은 회사가 내는 기여금이 미리 확정된다. 당신이 재직 중 퇴직금을 굴려 수익을 내든 손해를 보든 회사는 상관할 바 아니다. 퇴직 후 당신이 받는 연금은 투자 결과에 따라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다.

30여년 전 퇴직연금제도를 도입(1974년)한 미국의 예를 살펴보자. 80년대 초반까지 회사와 종업원 모두 새 제도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회사는 연금 부담 때문에, 종업원들은 행여 퇴직금을 떼이거나 덜 받게 될까봐 선뜻 응하지 않았다.

퇴직연금제를 살린 것은 호황이었다. 특히 90년대 미국 경제가 ‘건국 이래 최대 호황’을 구가하자 기업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어차피 퇴직연금으로 나갈 돈, 잘만 굴리면 부담을 크게 덜 수 있다는 생각에 확정급여형(DB)에 서둘러 가입하는 기업이 늘었다.

종업원들도 들썩거렸다. 어차피 자기 몫으로 회사가 내는 기여금, 잘만 굴리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욕심에 앞다퉈 확정기여형(DC)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내국세법 상의 이른바 ‘401(k)’ 조항은 퇴직연금 확산에 불을 질렀다. 세제 혜택을 강화한 401(k)는 회사가 낸 기여금에 종업원이 자기 돈까지 얹어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지난 95년의 경우 DB와 DC 자산은 미국 주식시장의 33%, 채권시장의 40%, 총 금융자산의 31%를 차지할 정도로 덩치가 커졌다. 다우와 나스닥 지수를 퇴직연금이 떠받쳤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러다가 일이 터졌다. 2000년대 초반 신경제 거품이 꺼지면서 주가가 급락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엔론 스캔들까지 발생했다. 엔론은 퇴직연금 재원의 약 60%를 자사주에 투자했으나 종업원의 주식 처분에 제한을 둔 것이 문제였다. 직원들은 회사가 망해가는 꼴을 멍하니 지켜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주식은 휴지가 됐고 퇴직 후 안락한 삶은 일장춘몽이 됐다. 이후 미국 퇴직연금 시장은 더이상 대박을 꿈꾸지 않는 성숙기로 접어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퇴직연금은 양날의 칼이다. 잘 쓰면 득이 되지만 잘못 휘두르면 베일 수도 있다. 제너럴 모터스(GM)가 근로자 복지에 발목이 잡혀 회생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GM의 본업은 퇴직연금 관리이고 자동차 생산은 부업”이라는 말이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도입 4개월 남짓한 국내 퇴직연금 시장의 성패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다만 30년 앞선 미국의 경험을 꼼꼼히 살펴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paul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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