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칼럼]

유시민 장관의 딜레마/곽인찬 논설위원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딜레마에 빠졌다. 하루 빚이 800억원씩 꼬박꼬빡 쌓여 가는데 어느 누구도 발 벗고 나서서 해결해 주겠다는 이가 없다. 이대로 가면 나라 재정이 파탄날 게 뻔한데도 말이다. 오는 2047년께 바닥이 드러날 국민연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정치인 유시민의 장관 임명을 놓고 말이 많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기대가 컸다. 유장관 정도의 힘이 있어야 개혁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잘못된 판단이었던 것 같다. 요즘 돌아가는 판세를 보면 유장관이 오히려 개혁의 걸림돌이 된 듯하다.

연금개혁에 여야 모두 시큰둥

오해하지 말고 듣기 바란다. 국민연금을 뜯어고치려는 유장관의 진지한 노력은 전 국민이 잘 알고 있다. 장관이 되면 오로지 국리민복에 충실한 행정가가 되겠다는 당초의 약속도 좋은 점수를 받고 있다. 언론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참 많이 달라졌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겸손하기 짝이 없는 40대의 유능한 장관이 바로 오늘날 유시민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냉철히 따져보자. 취임 이후 7개월 남짓, 유장관의 국민연금 개혁 성적표는 어디 내놓기엔 너무 초라하다. 3년 전 국회에 제출한 케케묵은 개정안과는 별도로 지난 6월 열린우리당에 보고한 개혁안은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유장관은 정치권, 그 중에서도 친정인 열린우리당이 못내 야속한 모양이다. 얼마 전 사석에서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1인 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김한길 원내대표를 찾아가 매일 조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정치 감각이 누구보다 뛰어난 유장관이 개혁안이 공중에 뜬 이유를 모를 리가 없다. 열린우리당은 당장 내년 대선이 급하다. 그러잖아도 지지율이 바닥인데 더 내고 덜 받는 개혁안을 주도했다간 정권 재창출의 마지노선마저 무너질까 두렵다. 고령화와 재정 파탄에 대비해야 한다는 고차원적인 경고는 유권자들의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그러나 더 내고 덜 받아가라면 금세 주판알을 튀기는 게 인지상정이다.

한나라당 역시 서두를게 없다. 연금 개혁은 잘해야 본전이다. 집권당도 아닌데 총대를 멜 이유가 없다. 정권을 되찾은 뒤 입맛대로 바꿔도 늦지 않을 거라는 계산도 있다.

묘한 것은 진보를 표방하는 열린우리당과 보수를 표방하는 한나라당의 연금 개혁 접근법이 뒤바뀌었다는 점이다. 보통 진보당은 소외계층 지원을, 보수당은 시장 논리를 강조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 기초연금제를 들고 나와 소외계층 보호를 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 정당은 다름아닌 한나라당이다. 유장관은 이를 두고 “두 정당이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평가했다.

내년 대선에 이어 내후년엔 총선이 잡혀 있다. 정치 일정상 올해 연금 개혁이 물 건너가면 앞으로 몇 년을 더 허송 세월해야 할지 모른다. 이 때문에 유장관은 개혁의 연내 마무리를 위해 무진 애쓰고 있으나 뜻대로 안 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야당의 방조 아래 여당이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정치인 유시민’ 견제에 속앓이

유장관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딜레마를 지적했지만 진짜 딜레마에 빠진 것은 유장관 자신이다. 한 고위 관료는 “개혁안이 통과되면 유장관에게 공이 돌아갈 텐데 누구 좋으라고 국회가 개혁안을 통과시키겠는가”라는 지적에 “사실 그게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한나라당보다 열린우리당 내부에서 유장관에 대한 견제가 더 심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유장관이 연금 개혁의 보이지 않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유장관이 작심하고 개혁안을 밀어붙이면 “정치적 야심을 위해 또 튄다”는 비난이 나올 것이다. 그게 무서워 가만 있으면 “유시민도 별 수 없구먼”이란 소리가 나올 것이다. 딜레마에 빠진 유장관은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paulk@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