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1630년 암스테르담,2006년 서울/이장규 증권부장

지령 5000호 이벤트


#1. 1630년 암스테르담.

지금 생각으론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땐 그랬다. 163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튤립 한 뿌리 가격이 집 한 채 값과 맞먹는게 너무나 당연했다.

당시 유럽국가 가운데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았던 네덜란드는 넘쳐나는 유동성으로 인해 꽃 투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국토가 좁은 탓에 네덜란드인들은 도시 중앙에 앙증맞은 공원을 만들고 아름다운 꽃 심기를 좋아했는데 이중 가장 값진 꽃이 튤립이었다. 또 그때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진출한 동인도회사의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고 있었는데 비싼 주식에 투자할 돈이 없었던 서민들은 튤립 한 뿌리에 모든 걸 걸었다. 튤립은 땅 한 뙈기만 있으면 쉽게 경작할 수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튤립은 꽃의 색깔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는데 붉은 줄무늬가 있는 ‘황제’는 암스테르담 시내의 집 한 채 값과 맞먹는 가격에 거래됐다. 게다가 튤립은 다음해 봄에 필 꽃의 색깔과 무늬가 어떻게 나올지 미리 알 수 없었기에 도박과 같은 매력을 지녀 투기는 더욱 극성을 부렸다. 한 뿌리가 황제튤립을 터트릴 수도 있고 평범한 꽃잎을 피울 수도 있었던 것이다.

서민들은 모든 재산을 팔아 튤립 투기에 나섰다. 튤립 뿌리의 적정가격이 얼마인지를 밝히려는 노력은 없이 모두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꾼이 돼 전매에만 열중했다. 더 비싼 값에 사줄 사람이 줄지어 있었기에 폭락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심지어 1주일 만에 10배나 뛰기도 했다.

투기의 끝은 소리 없이 찾아왔다. 1637년 2월3일 더 이상 살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튤립 값은 폭락했다. 아무리 싸게 팔려고 해도 팔리지 않는 상황이 된 것이다. 집 한 채 값을 웃돌던 튤립이 뿌리째 뽑혀 바구니째 두엄더미에 버려졌다. 풍경화가 얀 반 고엔은 폭락 하루 전에 한 뿌리를 구입했다가 19년 동안 비참한 가난에 시달리다 숨을 거뒀다.

#2.2006년 서울.

2006년 대한민국 서울은 400년 전 네덜란드의 튤립 열풍에 버금갈 정도로 부동산 광풍에 휩싸여 있다. 천장이 어딘지 모르게 폭등하는 부동산 값. 이젠 부동산 값이 거품인지 아닌지 따져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먼저 기회 비용 측면. 서울 강남 30평형 아파트의 집값은 약 10억원. 10억원을 금융상품에 투자할 경우 수익률 5%만 잡아도 매년 5000만원을 벌 수 있지만 집을 깔고 앉았기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치고 있다. 웬만한 샐러리맨의 연봉에 해당하는 돈이다. 집값이 한번만 뛰면 이 정도 기회 비용쯤은 가뿐히 보상 받으리라는 ‘강남 불패’의 믿음이 강하게 깔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기회 비용이 너무 크다는 생각이다.

주식의 주가수익비율(PER) 개념을 집에 도입해도 결론은 마찬가지. PER는 주가나 집값 등 가격이 이익·수익에 비해 얼마나 높게 형성돼 있는지 따지는 지표다. 이 수치가 높을수록 고평가됐다는 의미다. 주택을 통해 수익을 올리는 방법은 집을 전세놓고 보증금을 받아 자금 운용하거나 월세를 받는 것. 강남의 전세 비율은 30%로 전세금은 3억원, 수익률 5%라고 치면 연 수익은 1500만원. PER는 66.7배(10억원÷1500만원)로 계산된다. 전세수익(연 1500만원)을 통해 투자원금(10억원)을 회수하는데 무려 66.7년이 걸린다는 뜻도 된다. 주식시장 PER 9∼10배에 비해 7배 이상 고평가된 상태다. 물론 교육이나 주거환경 등 부동산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가격적인 측면만 고려한 결과이긴 하다.

최근의 집값 급등은 저출산 고령화로 인구가 점차 감소하고 머지않은 장래에 주택 수요도 줄어들 것이란 전망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어서 아이러니하다. 정책의 실패로 인한 관재(官災)의 혐의가 짙다.

마치 누군가 “범이야”하고 소리치면 앞다퉈 도망칠 것처럼, 등을 돌리고 호랑이 굴속에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서는 형국이다. 모두 2010년 이후에는 주택값이 떨어질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전에 자산을 한번 더 튀기려고 베팅하고 있다.


아이러니는 또 있다.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다는 정권인 노무현 정부 때 집값은 천정부지로 폭등하고 살기는 팍팍해져 서민의 피눈물을 가장 많이 흘리게 한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왜 그럴까. 아마 과거 정권과 달리 정권의 정통성에 너무 자신한 나머지 시장에 맡겨야 할 경제정책마저 ‘국민과 개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권부가 직접 나서 시장의 실패를 자초한 게 원인이 아닐까.

40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투기의 끝은 소리 없이 찾아올 지 모른다. 그러나 후유증은 소리를 참아내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울 것이며 그 아픔은 막차 탄 중산층과 서민들의 몫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jklee@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