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칼럼]

“회장님,M&A를 직시하세요”/곽인찬 논설위원



기업 사냥꾼 칼 아이칸이 KT&G 주식을 팔아 1년 남짓만에 1500억원 가까운 돈을 챙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매직 램프’라는 경제소설을 읽고 있었다. 순간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이거로구먼.” 소설과 아이칸의 KT&G 공략은 놀랄 정도로 닮은꼴이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아이칸의 주식 매각 주간사인 시티글로벌마켓증권의 관계자는 분명 “아이칸이 내놓은 물량을 주로 외국계 기관투자가들이 받아갔다”고 말했다. ‘매직 램프’에서 오디세이펀드는 5개 해외펀드를 동원해 지분을 처분하는 것으로 작전을 종료한다. 이런 우연의 일치가 있나. 마이에셋자산운용의 이종환 부회장이 쓴 이 소설을 한번 들여다보자.

아이칸은 전형적 투기자본
“작전명 매직램프. 적대적 인수·합병(M&A)의 먹잇감을 골라 짧으면 6개월, 길어도 1년 안에 원금과 수익금을 회수하는 게 최종 목표다. 미국계 헤지펀드 오디세이의 한국지점이 야전사령부다.

오디세이는 목표물로 찍은 세진자동차부품회사의 주식을 은밀히 사모은다. 매입 주체는 오퍼튜니티펀드로 해 오디세이의 존재를 감춘다. 세진이 발행한 해외전환사채를 ‘우군’인 홍콩의 제니스 호라이즌펀드가 인수하도록 계략을 짠다. 내막을 모르는 세진은 미끼를 덥석 문다. 이렇게 해서 확보한 지분이 세진 경영진의 지분과 맞먹는다.

이제 경영권 위협에 나설 차례다. 다급해진 세진이 막후 협상을 시도한다. 흥정의 결과 세진이 오디세이의 지분을 모두 되사기로 이면 합의가 이뤄진다.

오디세이의 작전은 주도면밀하다. 행여 나중에 주가조작 혐의로 검찰에 불려가지 않도록 짜여진 각본에 따라 임시주총을 연다. 속사정을 모르는 언론은 드디어 세진과 오디세이가 한판 붙게 됐다고 흥분한다. 결과는 경영진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이로써 오디세이는 지분을 처분할 명분을 얻었다. 겉으로는 주총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는 모양새다. 팔 때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주식을 한꺼번에 시장에 내놓으면 값이 떨어져 다른 투자자들의 원성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오디세이는 5개 해외펀드를 동원한다. 세진의 경영진은 나중에 이들 펀드로부터 5개 덩어리로 쪼개진 주식을 매입한다.”

소설이 현실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SK㈜의 경영권을 위협하던 소버린이 두차례 주총 대결에서 패하자 수천억원을 챙겨 한국을 떠났고 이 때도 몇 개 외국계 펀드가 소버린의 주식을 받아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대책없이 흥분하단 또 당해
소버린·론스타에 이어 아이칸까지, 투기자본 하는 짓이 참 얄밉다. 그렇다고 동북아 금융허브를 지향하는 나라에서 ‘우리끼리’를 외치며 문을 닫아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명분 싸움에서도 밀린다. 경영 투명성 제고 같은 대의(大義)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는 게 우리 기업의 현실이다. 실제 투기자본이 기업지배구조 개선, 주주이익 환원에 기여한 측면이 없지 않다.

싫든 좋든 투기자본은 돈에 굶주린 맹수처럼 우리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먹잇감 다 뜯긴 뒤 핏대 세워봐야 소용없다. 그보다는 비상식적 단기차익에 대한 과세 그물코를 촘촘히 짜는 등 구멍 뚫린 제도를 보완하는 게 현명한 일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투기자본이라면 쌍심지부터 돋우는 우국충정형 헤지펀드관(觀)을 잠시 접고 ‘매직램프’에서 세진의 정회장과 오디세이펀드의 박지점장이 나누는 얘기를 한번 들어보자.

“박지점장님, 같은 한국인끼리 너무 하는 것 아닙니까. 안 그래도 기업하기 힘든데.”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정회장님. M&A를 통한 경영권의 이전과 거래는 세계적인 추세 아닙니까. 이제는 M&A를 기업 경영의 일부라고 생각하셔야 될 것 같은데요.”

/paulk@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