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칼럼] 인질사태 ‘코리아 신드롬’/곽인찬 논설위원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7.08.07 16:26

수정 2014.11.05 06:18



1973년 8월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의 한 은행을 털려던 강도들이 직원들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했다. 인질들은 엿새 뒤 무사히 풀려났다. 희한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풀려난 인질들이 되레 강도들의 행위를 두둔하고 나선 것이다. 엿새 동안 강도와 인질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간 걸까. 현장에서 경찰을 도왔던 범죄심리학자 닐스 베예로트는 이를 두고 ‘스톡홀름 신드롬(증후군)’이라고 불렀다.

미국의 신문왕 윌리엄 허스트의 손녀인 패티 허스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스톡홀름 인질 사건이 터진 지 6개월 뒤 미국의 도시 게릴라를 표방하는 자칭 ‘공생해방군(Symbionese Liberation Army·SLA)’이 19세 패티를 납치했다. SLA는 그녀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무산자들에 대한 식량 배분을 요구했다.

로빈 훗을 흉내낸 이들의 ‘정의감’에 감명을 받은 걸까, 패티는 석방을 거부하고 아예 SLA 단원이 됐다. 두 달 뒤 자동소총을 들고 샌프란시스코의 한 은행을 터는 그녀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고 결국 체포됐다. 변호인은 패티가 억압된 분위기에서 세뇌를 당해 스톡홀름 신드롬에 시달렸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7년 형을 선고했다.

인질이 납치범을 두둔하는 스톡홀름 신드롬이 먼 나라 얘기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코리아 신드롬’의 특징은 사회 전체가 인질로 잡혀 납치범들을 두둔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장에 잡힌 인질 23명, 아니 이제 21명은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는 한국 사회 구성원의 상당수는 “왜 가지 말라는 곳에 가서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드느냐”며 인질들을 질타하고 있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사태의 본질은 탈레반 무장세력이 비무장 한국 민간인들을 납치했으며 이들의 생명을 놓고 비열한 흥정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가 인질 구출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건 당연하다. 반면 납치범들을 옹호할 이유는 없다. 테러에도 격이 있다면 탈레반은 저질이고 악질이다. 자기 몸을 내던지는 테러는 숭고한 뜻이라도 있다. 여자까지 잡아 놓고 인질들을 한 명 한 명 살해하는 행위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포털 사이트에선 놀랄 일이 벌어지고 있다. 탈레반보다 인질들에 대한 비판이 더 많다. “모두 순교하는 게 최상책”이라는 주장까지 있으니 더 할 말이 없다. 그 배경에는 특정 종교에 대한 적개심이 배어 있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배타적 선교에 대한 평소의 악감정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오고 있다.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선교까지 도마 위에 올랐다. 종교인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여러 가지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지하철 선교가 이번 사태의 본질은 아니다. 설사 짜증나는 선교가 맘에 들지 않더라도 지금은 인질의 생명을 구하는 게 최우선이다. 종교인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건 그 다음의 일이다.

언젠가 납치 인질극을 벌인 강도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떠벌려 화제에 오른 적이 있다. 소영웅주의에 사로잡힌 그 말을 수긍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다고 그것이 강도가 한 짓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돈 없어도 적법한 대우를 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는 별도로 총칼을 앞세워 남의 생명을 위협하는 행위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 이번 사태의 본질은 저질 탈레반 무장 세력이 비무장 한국 민간인들을 납치한 것이다. 국가는 인질 구출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 사회에 납치범보다 인질을 더 비판하는 ‘코리아 신드롬’이 나타난 것은 있어서는 안 될 부끄러운 현상이다.

/paul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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