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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경험으로 진화하는 경제/강일선 로스앤젤레스 특파원

박지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9.10.22 17:12

수정 2009.10.22 17:12

역사는 반복하면서 진화한다. 최근 미국의 경제정책과 시장 동향을 보면 이런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지금과 가장 가까운 불황기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였다. 이란·이라크 전쟁과 미국·소련 냉전에서 발단이 된 오일쇼크와 금융위기는 세계 경제를 일순간에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미국과 유럽의 초대형 기업들이 잇따라 쓰러지고 세계는 극도의 혼미 속으로 빠져 들었다. 많은 국가가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직면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10%를 넘었다.

폴 볼커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과감한 인플레이션 억제정책을 실시하면서 금리를 끌어 올렸다. 1977년 4%대에 있던 연방기금(FF) 금리는 1979년 12월 처음으로 10%를 돌파했고 1981년 1월에는 기록적인 20.5%에 달했다. 장기 국채들의 수익률은 15%까지 치솟았고 회사채들의 수익률은 30% 내외까지 올랐다. 부실 채권인 정크 본드 수익률은 40%를 넘기도 했다.

당시는 인플레이션 속에서의 경기 침체였다. 스태그플레이션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형 투자자들은 회사채들에 대한 투자에 열을 올렸다. 고정 수익을 보장하는 회사채는 큰 인기였다. 공격적인 투자자들은 수익률이 훨씬 높은 정크 본드에 대한 투자를 확대했다. 1982년 마침내 정크 본드 버블이 터졌다. 기업들의 수익은 크게 늘지 않은 반면 이자율은 천정부지로 높아져 부실 기업들의 붕괴는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이 여파로 중소형 은행들의 파산이 줄을 이었다.

원자재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 말부터 대형 펀드들이 곡물과 에너지, 귀금속들을 사재기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 금과 석유 등 많은 상품이 역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당시 금값은 인플레이션을 감안해 조정할 경우 온스당 2300달러에 달했다. 헤지 펀드들은 막대한 돈을 거둬 들였다. 1990년대 이후 세계를 뒤흔든 대형 헤지 펀드들은 이미 그 때 기반을 다졌다.

1980년 초 택시 운전사였던 브루스 카브너는 마스터 카드사에서 단 3000달러를 인출해 콩에 투자해 4만5000달러로 불렸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칵스턴 투자회사를 설립했고 몇 해 전에는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 250대 재벌에 꼽히기도 했다.

세계 최고의 갑부들은 현재 채권 매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워런 버핏은 주식을 팔아치우고 회사채와 지방 정부 채권들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고 있는 중이다. 우량 채권들은 무섭게 팔려 나간다. 이자율이 높은 정크 본드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조지 소로스와 함께 퀀텀펀드를 설립했던 원자재의 귀재 짐 로저스는 향후 수년 내에 미국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지고 채권버블은 꺼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세계 돈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 투자의 천재들은 지금 한결같이 1980년 초에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들의 투자방식은 자신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크게 보면 시대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돈줄이 막히고 불확실성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현금을 가진 사람들은 일종의 고리대금업자로 바뀌어 합법적으로 돈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1980년 초가 아니라 그 이전인 1970대초 스태그플레이션 때와 1929년부터 시작된 대공황기(디플레이션) 때에도 그러했다.

지난 2년간 금융위기 속에서 각국 정부는 공격적인 통화공급에 나서 1930년대와 같은 공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30조달러가 풀렸다. 미국에서만 13조달러가 방출됐다. 하지만 어느 나라도 대공황기 때 적용된 케인스 식의 사회간접자본(SOC)을 통한 유효 수요 확대정책을 실시하지 않는다. 대신 주식시장의 부양을 통해 산업 전반에 걸친 균형적 발전을 도모하면서 녹색산업과 하이테크 등 미래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부가가치가 경기부양의 새로운 척도가 된 것이다. 사회의 저변에 돈을 풀어 직접적으로 수요를 확대하는 것보다는 부가가치가 높은 기업들에 돈을 풀어 고용을 확대하고 소비를 늘려나가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파급 효과가 크다는 판단에서다.
사회 빈곤층에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역사는 과거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kis@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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