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칼럼]

일본병,잃어버린 20년/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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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인 오마에 겐이치가 한국을 보는 눈이 확 달라졌다. 몇 년 전만 해도 한국이 결코 일본을 따라잡지 못할 것처럼 얘기하던 그가 이제는 거꾸로 일본이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갑자기 비행기를 태우니 어지러울 지경이다. 한국 경제를 한 수 아래로 보고 충고를 아끼지 않던 오마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의 최신작 ‘지식의 쇠퇴’에 답이 있다. 일본 사회의 집단IQ 저하와 무기력증을 통렬하게 비판한 이 책에서 오마에는 생각하지 않는 일본인, 작은 행복(Small Happiness)에 만족하려는 소시민적 일본인에 분통을 터뜨린다. 모든 게 버블 붕괴에서 비롯됐다. 일본인들은 리스크의 ‘리’자만 나와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리스크를 피하려다보니 제로금리에도 불구하고 은행에 뭉칫돈을 계속 맡기는 ‘경제음치’ 짓을 멈출 수가 없다. 게다가 만화 ‘소년점프’를 보고 자란 청년세대는 휴대폰과 반경 3m 외에는 관심이 없다. 자동차나 마이홈, 돈 욕심도 없다. 오마에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를 사용하면 하루 식비 500엔의 생활이 가능하다…맥도널드의 아르바이트 월급은 평균 4만6000엔이다. 그것은 샐러리맨이 부인에게 받는 평균 용돈보다 1만엔 정도 많다…프리터(프리 아르바이터·Free Arbeiter)로도 파라사이트(부모에 얹혀 사는 독신족·Parasite)로도 적당히 아르바이트를 하면 OK라는 값싼 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오마에는 일본 전체가 앓는 의욕 상실과 소시민화를 포르투갈 현상이라고 부른다. 포르투갈은 한때 대항해시대의 주역으로 거대한 식민제국을 건설했으나 네덜란드와 프랑스, 영국에 한 번 밀리자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순식간에 세계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다. 일본이 꼭 포르투갈 짝이 날 수도 있다는 게 오마에의 걱정이다.

90년대 초 버블 붕괴 이후 ‘잃어버린 10년’은 어느덧 ‘잃어버린 20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한때 세계의 혁신을 주도하던 일본이 무기력증의 저주에서 벗어날 방도는 없는 걸까. 오마에는 한국과 중국을 배우자고 말한다. 그러려면 먼저 아시아를 우습게 보는 일본인의 버릇부터 고쳐야 한다. 일본은 19세기 말 후쿠자와 유기치가 탈아론(脫亞論)를 편 이래 아시아를 깔보고 서구를 편애하는 못된 습관이 남아 있다. 중국이나 한국을 본받자고 하면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거나 자존심이 상하는지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오마에는 한국에서 뭘 배우라는 걸까. 그는 먼저 삼성을 배우라고 말한다. “일본 기술을 모방했을 뿐”이라며 삼성을 얕볼 게 아니라 자존심을 접고 삼성을 벤치마킹하라는 것이다. 영어로 수업하는 이화여대 국제학부나 ‘다국적기업의 아시아 본부장을 만들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고려대 경영대학원도 글로벌 전략화에 더딘 일본이 한국에서 배워야 할 점으로 꼽힌다.

금융위기 이후 한국 경제를 칭송하는 소리가 드높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 우익잡지에 ‘한국 경제가 일어설 수 없는 이유’라는 글을 실었던 오마에도 그 대열에 뛰어들었다. 삼성전자의 올 3·4분기 영업이익이 소니·파나소닉·히타치 등 일본 경쟁사 9곳의 이익을 다 합친 것보다 배나 많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니 그럴 만도 하다. 한국의 올해 무역흑자 규모는 사상 처음 일본을 앞지를 것이 거의 확실하다.

아시아의 늙은 호랑이로 전락하려는 일본을 두고 고것 참 쌤통이라고 하고 싶은 맘이 굴뚝 같지만 그래선 한국을 애써 무시하려는 일본과 다를 바 없다. 생각하기를 멈춘 일본인의 대오각성을 촉구한 오마에의 절규는 우리에게도 득이 된다. 한국은 수십년 간 일본을 모델로 쉼없이 달려 왔다.
지금은 일본을 반면교사로 삼을 때다. 우리라고 한국병에 걸리지 말란 법이 없다. 오마에는 경제에서 거품을 빼고 위기 의식 아래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하는 것만이 한국병을 예방할 가장 확실한 백신임을 새삼 일깨워준다.

/paulk@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