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칼럼]

금융의 삼성전자가 나오려면/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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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삼성전자 얘기가 나올 때마다 속으로 피식 웃는다. 오해 마시라. 가장 최근에 공개 석상에서 이 말을 한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 내정자를 비꼬려는 게 아니다. 어 내정자 아니라 누가 이 말을 해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처럼 되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금융의 삼성전자 얘기엔 어김없이 대형화니 인수합병(M&A)이니 하는 소리가 따라붙는다. 여기엔 두 가지 의견이 맞서는 듯하다. 하나는 지금이야말로 한국 금융이 덩치를 키워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호기라는 것이다. 미국·유럽 등 전통의 금융 강국들이 비실거릴 때 빈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강슛을 날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늘 등장하는 비유가 "미국 금융이 대학생이라면 한국 금융은 초등학생"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후퇴해봤자 고등학생이고 한국은 전진해봤자 중학생인데 괜히 미국 따라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사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크다는 은행도 월가 경쟁자들과 맞붙으면 한 방에 나가 떨어진다.

반면 대형화·M&A를 한물 간 유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에서 이른바 볼커 룰(Volcker Rule)을 낳았다. 이 룰의 핵심은 금융 과잉을 규제하는 데 있다. 비대해진 월스트리트 즉 금융의 덩치를 줄여 메인스트리트 즉 제조업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겠다는 것이다. 금융 과잉에 대한 비판은 범 세계적이다. 유럽은 특히 헤지펀드와 파생상품에 눈을 부라리고 있다. 은행세 도입을 위한 논의도 활발하다. 앞으론 대마불사 그런 거 없으니 죽든 살든 알아서 하라는 게 각국이 은행세를 도입하려는 근본 취지다.

위기 이후 새로운 시대 흐름을 뉴 노멀(New Normal)이라 부른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뉴 노멀의 특징 중 하나로 신금융규제와 디레버리징(차입 축소)을 꼽는다. 올드 노멀(Old Normal)의 레버리징·위험투자와 대립되는 개념이다. 이런 마당에 M&A·대형화를 부르짖는 건 세상 물정 모르는 아둔한 짓이라는 것이다.

M&A·대형화한다고 삼성전자급 은행이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한국 은행들의 특징 중 하나는 비국제화다. 국내 영업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 해외 진출하려면 먼저 합쳐야 한다는 주장은 국제화 낙제점을 둘러대기 위한 핑계로 들린다. 반면 삼성전자는 국제화의 선구자다. 그것도 M&A가 아니라 독자적인 기술력으로 세상을 제패했다. 요컨대 삼성전자는 덩치가 커서 성공한 게 아니라 성공했기 때문에 덩치가 커진 것이다.

결정적으로 삼성전자의 성공 뒤엔 오너가 있다. 전략적 장기투자와 일사분란한 추진력은 오너 체제만의 강점이다. 어떤 월급 경영자도 이걸 흉내낼 수 없다. 지금 월가에서 이름깨나 떨치는 많은 금융사들도 오너 체제 아래서 성장했다. 골드만삭스는 140년 전 마르쿠스 골드만과 그의 사위인 사무엘 삭스가 창업했고 메릴린치는 찰스 메릴과 친구 에드문드 린치의 동업으로 1914년 출범했다. 모건스탠리는 J P 모건의 손자인 헨리 모건과 해롤드 스탠리가 1935년에 세운 회사다.

어윤대 회장 내정자는 오너가 아니다. 그는 임기 3년의 월급 회장일 뿐이다. 그가 국민은행을 금융의 삼성전자로 바꾼다면 기적이다. 어 내정자 아니라 누가 그 자리에 와도 비오너 회장은 한계가 있다. 국내 영업에 치중하는 무주공산 은행이 금융의 삼성전자로 둔갑하길 바라는 건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격이다.

솔직히 인정하자. 현 상황에서 금융의 삼성전자는 과욕이다. 세계 초일류 은행이 출현할 풍토가 아니다. 감독 당국이 민간은행을 산하기관 취급하는 관행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꿈은 요원하다. 경쟁력의 요체는 덩치가 아니라 사람이다. 금융의 삼성전자가 나오려면 먼저 금융의 이건희, 금융의 정주영이 나와야 한다.
미국의 J P 모건처럼 창업자의 이름을 딴 은행이 왜 한국에선 나오지 못하는가.

삼성전자는 전 세계 상품들이 경쟁하는 미국시장에서 정면승부를 걸었다. 뉴욕 한복판에서 월가 은행들과 맞짱을 뜰 실력과 배짱이 과연 우리 은행들에 있는가. 덩치만 키운다고 그런 실력과 배짱이 생길까. 몇 번을 생각해도 그 대답은 노(No)다. 기업가정신으로 충만한 진짜 주인이 은행에 나타나지 않는 한 금융의 삼성전자는 신기루에 불과할 따름이다.

/paulk@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