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칼럼] 빚 우습게 본 성남시장/곽인찬 논설실장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0.07.20 17:37

수정 2010.07.20 17:37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게 빚이다. 오죽하면 빚 받으러 온 사람을 저승사자로 그릴까. 호환(虎患)은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멸종했으니 동물원에서만 조심하면 된다. 마마 곧 천연두는 백신 개발 덕분에 세계보건기구(WHO)가 오래 전에 근절을 선언했다. 빚은 거꾸로다. 없어지기는커녕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리스는 빚에 된통 당했다.
스페인·포르투갈도 안심할 처지가 아니다. 우리도 일찌감치 빚 무서운 걸 알았다. 외환위기 때 한국 정부는 돈줄을 쥔 국제통화기금(IMF) 앞에서 말 그대로 설설 기었다. 부채 비율이 높은 기업들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빚 많은 개인들도 철퇴를 피해가지 못했다. 아파트 값은 뚝뚝 떨어졌고 직장을 잃은 실업자들은 노숙자로 전락했다.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총재가 당시 IMF가 내놓은 처방이 너무 가혹했다고 인정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역설적이지만 오늘날 한국의 재정 건전성이 주요국 중 가장 양호한 편에 속하는 것은 이때 당한 설움이 약이 됐기 때문이다.

빚은 종종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랑스 등 전승국들은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패전국 독일에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의 전쟁배상금을 물렸다. 돈이 없으면 석탄으로 대납하도록 했다. 나라 살림은 거덜이 났다. 절망에 빠진 독일의 희망으로 떠오른 히틀러는 일방적으로 조약을 파기했다. 빚을 둘러싼 각국의 대립은 결국 2차 대전에 불을 지피는 또 하나의 도화선이 됐다.

현대그룹은 재무구조개선약정 체결을 놓고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과 벼랑 끝 싸움을 벌이고 있다. 약정을 맺으면 외환은행은 갑(甲), 현대그룹은 을(乙)이 된다. 을은 갑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이게 싫으면 빚을 몽땅 갚으면 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결국 현대그룹의 딜레마는 빚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선 안 되지만 몸을 파는 여자들을 옭아매는 것도 빚이다. 최악의 경우 섬으로 '유배'를 당하기도 하는 게 가슴 아픈 현실이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국토해양부 등에 내야 할 5200억원에 대해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나중에 지방채를 찍어서라도 갚을 테니 당분간은 지급을 유예해달라는 것이다. 그것도 채권자인 LH·정부와 사전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이 시장은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빚을 우습게 봤다. 빚을 갚기 힘들면 먼저 채권자 앞에 무릎 꿇고 사정하는 게 게임의 법칙이다. 채권자를 설득하기 위한 자구노력은 필수다. 그럴듯한 자구책은 하나도 내놓지 않고 당분간 빚을 갚을 수 없다고 나자빠지니 이런 배짱이 어디 있는가. 이 시장은 이른바 'BJR(배째라)'의 원조 지자체장이라도 되려는가.

재정 파탄의 책임을 전임 시장에게 떠넘기려는 태도도 당당하지 못하다. 전임자가 절단을 냈든 말든 성남시 재정은 이제 이 시장의 책임 아래 있다. 취임 전 일이라고 퉁 치면 다인가. 만약 새 대통령이 국가부채를 못 갚겠다고 버티면 그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최고경영자(CEO)가 바뀐다고 기업의 빚이 달라지는가. 아버지의 빚은 자식에게 대물림된다. 못 갚으면 저승사자가 찾아오거나 월급을 차압당한다. 시 정부라고 다를 바 없다.

4년 전 파산을 신청한 일본 홋카이도의 유바리 시는 공무원을 절반 이상 줄이고 학교를 통·폐합하는 한편 공공요금을 대폭 올렸다. 시가 소장한 유물도 내다팔았다. 시 의원 감축은 기본이다. 이 시장은 성남시의 재정 건전성 향상을 위해 무슨 조치를 취했는가.

국내에서 지자체의 모라토리엄 선언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앙정부는 다부진 원칙을 세워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스스로 살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 한 중앙정부가 지방정부를 도울 이유가 없다. 게다가 성남은 손꼽히는 부자도시다. 재정이 취약한 다른 지자체에서 볼 때는 배부른 투정일 따름이다.

지방채도 함부로 찍게 해선 안 된다.
중앙정부의 국채와 마찬가지로 지방정부의 지방채는 가능한 한 찍지 않는 게 상책이다. 빚의 수렁에 빠졌다간 지방채를 찍어 지방채 이자를 갚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 시장은 즉각 모라토리엄을 철회하고 시민들에게 긴축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호소해야 옳다. 공약은 현실에 맞게 조정하라. 그리고 세상의 모든 지자체들이여, 제발 걷은 만큼만 써라!

/paul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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