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칼럼] 위대한 사회,공정한 사회/곽인찬 논설실장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0.08.17 17:05

수정 2010.08.17 17:05

1960년대 미국은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는 흑인들의 아우성으로 들끓었다. 1963년 8월 마틴 루서 킹 2세 목사는 일자리와 자유를 요구하며 워싱턴으로 행진했다. 그로부터 9개월 뒤 미시간대학 졸업식 연사로 나온 린든 존슨 대통령은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를 선포했다. 이후 인종차별은 법으로 금지됐고 흑인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다. 가난한 학생은 국가의 지원을 받았고 메디케어·메디케이드 등 고령자와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보장보험도 속속 도입됐다. 비유럽 출신 유색인종에게도 이민의 문이 넓어졌다.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집권 후반기의 행동강령으로 ‘공정한 사회’를 제시했다. 흥미롭게도 두 대통령의 연설문은 닮은 구석이 많다. 이 대통령의 연설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국민은 대한민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어갈 것”이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위대한’이라는 형용사의 폭넓은 쓰임새를 고려해도 두 대통령의 닮은꼴 연설문이 꼭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케네디 암살 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 대통령은 흑인 민권운동에 직면해 있었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고 판단한 존슨은 ‘위대한 사회’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존슨이 미시간대에서 연설할 때 버락 오바마는 겨우 세 살이었다. 민주당 출신 존슨의 비전은 40여년 뒤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의 탄생으로 꽃을 피웠다.

존슨 대통령은 교육을 ‘위대한 사회’로 가는 가장 든든한 무기로 여겼다. 돈이 없어 교육을 못 받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게 존슨의 생각이었다. 민주당이 주도하는 의회는 초·중등교육법과 고등교육법을 통과시켜 대통령의 비전을 제도화했다. 이로써 저소득층 학생들을 국가가 지원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존슨 대통령이 비전을 정책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가 돋보인다. 하나는 치밀함이다. 졸업식 연설 직후 존슨은 미국 사회를 뜯어 고칠 태스크포스(TF) 14개 팀을 가동시켰다. TF 팀이 마련한 초안이 백악관에 제출되면 관련 부처 회람을 거쳐 별도 위원회가 재평가하는 절차를 밟았다. 별도 위원회는 실무관료 위주로 구성됐다. 동시에 법안 통과를 위해 의회를 설득할 전략도 짰다. 존슨 대통령이 최종안을 검토할 땐 백악관 예산관리국장이 동석했다. 아무리 좋은 비전도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회’의 골격은 이듬해(1965년) 신년연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존슨은 부자·기업과 대립각을 세우지도 않았다. 그는 ‘위대한 사회’라는 보편타당한 용어를 골랐다. 흑인 저소득층을 돕자고 말하는 대신 고상한 목표를 제시하고 미국인들의 건전한 상식에 호소했다. 기업들이 앞다퉈 상생안을 발표하는, 보기 민망한 일도 물론 없었다.

‘위대한 사회’를 놓고 게으른 복지를 만연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국가가 빈민 구제에 개입했지만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한국 같으면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속담을 들먹일 판이다. 그러나 존슨의 비전은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만약 존슨이 킹 목사의 요구를 거부했다면 과연 미국 사회가 지탱할 수 있었을까. 저소득층을 보듬는 교육과 의료 정책이 없었다면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승자독식의 논리가 미국을 황폐화시켰을지도 모른다.

외환·금융위기를 거친 한국 사회도 한 번은 손질할 때가 됐다. 지난 10여년 새 우리 사회는 부자와 서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간극이 크게 벌어졌다. 완충지대인 중산층은 유실 위기를 맞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 10년(1998∼2008년)간 소득불평등이 26개 회원국 중 가장 빠른 속도로 나빠졌다. 최상위와 최하위 간 소득불평등은 미국에 이어 ‘당당’ 2위에 올랐다.

손을 대긴 대야 하는데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 너무 거칠어서 탈이다. 전임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사회를 공공연히 2대 8로 나눴다.
친기업으로 알았던 이명박 대통령의 친서민 변신은 우당탕 소리가 요란하다. ‘공정한 사회’는 일회성 캐치프레이즈가 아니라 철학과 성찰의 결과로 보고 싶다.
존슨의 ‘위대한 사회’에서 교훈을 얻자. 오로지 표를 구걸하는 포퓰리즘이 아니라면 친서민이란 용어부터 버리자. ‘친-’을 붙여 어느 한쪽 편을 드는 순간 공정성은 증발하고 반발만 부른다.

/paul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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