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칼럼] 준표리즘/곽인찬 논설실장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0.08.31 11:08

수정 2010.09.01 11:08

총리와 장관 후보를 줄줄이 낙마시킨 인준 청문회의 스타는 누구였을까. 민주당 박영선 의원? 뭔가 부족하다. 내 눈엔 내부 비판세력인 한나라당 홍준표 최고위원의 활약이 더 돋보였다. 그는 “거짓말을 한 분이 어떻게 공정한 사회를 이끌 수 있는가” “강남에 사시는 분이 노후에 창신동 쪽방에 살기로 작정하셨는가” “두세 번 죄송스러운 일을 한 분들은 제의를 받았을 때 사양했어야지”라는 말로 김태호·이재훈·신재민 후보자를 끌어내렸다. 그의 강력한 태클에 걸려 재·보선 승리에 편승해 친정체제를 구축하려던 대통령의 개각 구상도 헝클어졌다.

이 시점에 정치인 홍준표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한나라당 서민정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서민정책특위는 대단한 조직이다.
위원장 아래 기획단·사무국이 따로 있고 분야별로 10개 소위를 거느리고 있다. 상설 정책위원회가 무색할 지경이다. 오는 2012년 총선·대선을 앞두고 친서민 정책을 요구하는 당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질 텐데 그 중심에 홍 위원장이 있다.

홍 위원장은 두부모 자르듯 좌·우로 쉽게 가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본인 스스로 좌니 우니 편가르기를 거부한다. 그의 정치철학은 “가진 자에게는 자유를, 가지지 못한 자에게는 기회를 주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명박 정부 전반기가 자유에 치중했다면 후반기는 기회로 무게 중심을 옮겨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비즈니스 프렌들리’에서 ‘피플 프렌들리’로 가자는 말도 한다. “우파 포퓰리즘 한 번 해보자”는 발상은 여기서 나왔다.

홍 위원장의 주장엔 공감할 바가 적지 않다. 눈을 밖으로 돌리면 월가의 무한 탐욕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시장만능주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다. 눈을 안으로 돌리면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더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자와 서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 양극화는 한 번 손질할 때가 됐다.

마침 홍 위원장이 총대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에게 ‘공정한 사회’ 구현의 책임을 맡겨보는 건 어떨까. ‘홍 반장’에게 서민정책을 주도할 완장을 채워주자는 거다. 그는 가진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소리 높여 외치지만 부유세 도입엔 반대한다. 서민에 더 많은 기회를 주자고 말하지만 국가가 결과의 평등까지 강제하는 것에는 반대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는 진보적 보수에 속한다. 그러니 보수 본류가 벌벌 떨 건 없다.

홍준표식 서민정책엔 ‘준표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이자. 외국에선 정책이나 법안에 사람 이름을 붙이는 게 흔하다. 대처리즘이 좋은 예다. 국가 재정건전성을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추구하는 포퓰리즘이 준표리즘의 핵심이 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건실한 재정과 서민정책은 양립하기 힘들다. 부자와 서민 양쪽에서 반발을 각오해야 한다. 묘안을 짜내는 건 홍 위원장의 몫이다.

한 가지 걱정은 홍 위원장이 한(漢)고조 유방처럼 본심을 숨기는 데 능한 후흑(厚黑)이 아니란 점이다. 후흑은 면후심흑(面厚心黑)을 줄인 말로 성벽처럼 두꺼운 얼굴과 숱처럼 시커먼 마음을 뜻한다. 유방이 천하를 놓고 항우와 다툴 때 대장군 한신이 사신을 보내 자기를 제나라 가왕(假王)으로 임명해 주길 청했다. 부하 장수의 당돌한 요구에 분노한 유방은 “이 무슨 돼먹잖은 소리냐”며 벌컥 화를 냈다. 그 때 모사 진평(陳平)이 유방의 발을 지그시 밟았다. 그 뜻을 헤아린 유방은 곧장 “대장부가 진왕(眞王)이면 모를까 가왕이라니 무슨 당치 않은 소리냐”며 그 자리에서 한신을 제왕에 봉했다. 항우를 꺾으려면 아직 한신이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호불호가 뚜렷한 홍 위원장은 능구렁이 유방과 대척점에 서 있다. 조현오 경찰청장이 끝내 임명장을 받은 것을 두고 “차명계좌 존부(存否)에 자신이 있으니까 임명한 것 아니겠느냐”며 ‘천기’를 누설해 버렸다. 이를 두고 유시민 전 장관은 “철이 없다”고 맞받았다. 난형난제다. 청컨대 서민정책을 펼 때는 부디 후흑을 염두에 두고 쓸데없이 적을 양산하지 않길 바란다.

아르헨티나의 페로니즘과 비교하면 준표리즘은 좌파 포퓰리즘 대 우파 포퓰리즘의 대결이다.
페로니즘은 경제를 망가뜨린 원흉 소리를 듣는다. 준표리즘은 한국 경제 나아가 한국 사회를 살릴 수호천사가 되길 바란다.
진심이다.

/paul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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