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가 만난 아트人]

(29) 음과 양의 조화 하모니즘 창시자 김흥수 화백

▲ 8일 서울 평창동 김흥수 미술관에서 만난 92세의 김흥수 화백은 오랜만에 인터뷰를 한다며 차려입고 나왔다. 뒤에 보이는 흑백사진속 인물은 36세 때 김 화백이다.

검정 중절모, 하얀 양복, 얼룩무늬 행커치프, 새빨간 셔츠, 독특한 문양의 커다란 목걸이, 백구두…. 아직 죽지 않았다. '원조 패셔니스타'. 휠체어를 타고 있었지만 화보 속에 있는 듯했다.

"오랜만에 하는 인타(터)뷰라 신경썼다"며 "직접 골라 입었다"는 그는 '천하의 김흥수'로 불리는 서양화가 김흥수 화백(92)이다. 음과 양의 조화, 구상과 추상을 합친 하모니즘 창시자다.

지난 8일 서울 평창동 김흥수미술관에서 만난 김 화백은 "최근에 병원에 입원하고 기력이 쇠약해져 거동이 많이 불편하고 말씀을 잘 못하신다"는 부인 장수현 관장의 말과 달리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고 손짓을 하며 힘 있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세월과 시간의 위력은 무서웠다. 보청기를 끼었어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귀에 가까이 다가가 큰 소리로 말해야 알아들었다. '고함쟁이' '폭군 화가' '스캔들 메이커' '타고난 정력가' 김 화백도 "세월 앞에는 별 뾰족한 수 없이 힘이 빠졌다."

몇 번을 과거의 침묵 속에 빠졌다. 이야기를 하다가 기억을 더듬었고 가만히 생각했다. 10초…. 전구가 켜지듯 목소리가 커지고 다시 살아났다. "미안합니다. 그동안 인터뷰를 안 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룬 하모니즘 탄생 배경을 말했다.

1954년 반도호텔에 벽화를 그리던 일, 그 상금 3000달러를 받아 파리로 유학 간 일. 동서양을 합치겠다는 고르바초프의 사상과 맞물려 러시아 예르미타시미술관과 푸시킨미술관에 초대된 일 그리고 지금 부인에 대한 마음 등 조각조각 끊어진 기억을 되살리며 과거와 현재를 오갔다. 부인은 옆에서 전시도록, 책자를 보여주며 김 화백의 잘린 기억을 이어주기 정신없다. 혼란한 말 속 장 관장이 부연설명을 하면 "그거 아니야. 됐어 됐어"라며 부인 손을 툭 쳤다. 고집은 여전했다. 2시간가량 김 화백은 물 한잔도 마시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큐비즘을 공부한 후에는 그림이 자꾸 좋아졌어요. 1960년 파리에서 두 번째 개인전 할 때 그림을 다 팔았어요. 50점을 출품했는데 전시 때 40점이 팔리고 전시가 끝났는데도 10점이 다 팔렸어요. 그 덕분에 3년 만에 살롱 도톤 회원이 됐지요. 일본 화가는 몇 십년 있어도 안 됐는데 다들 놀랐어요. 그런데 파리 유학에서 돌아와 보니 혁명이 일어나고 그림도 안 팔리게 됐는데 한미재단 후원으로 미국 필라델피아 무어대 초빙교수로 가게 됐습니다."



―하모니즘은 어떻게 나오게 됐나?

▲한국전쟁 때 피란 중이었어요. 부산에서 권옥연, 남관 등 화가 몇 명이 다방에 앉아서 신문을 보다가 '프랑스 파리에서 추상화가 시작됐다'는 기사를 읽고 '우리도 추상을 시작하자'는 말을 했어요. 내가 반대하면서 '남의 것 모방하지 말고 우리 것을 하자'고 했지요. 그런데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더라 말입니다.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됐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반추상도 나오고. 미국 가서 추상화가 나오는데 그때가 1967년이죠. 완전히 추상까지 간 것이 1973년입니다. 당시엔 추상화에서 하이퍼리얼리즘이 유행하던 때였어요. 어느 날 학교에 갔더니 학생들이 그림을 던져놓고 갔어요. 추상화하고 하이퍼리얼리즘하고 같이 우연히 겹쳐 있는데 그게 멋있더라 말입니다. 저렇게 그리면 되겠다. 집으로 달려가 그동안 그렸던 구상과 추상을 합쳐 놓고 보니 괜찮더군요. 학교에 가져가서 학생들에게 구상과 추상을 붙였다 떼었다 하고 보여주니까 학생들이 붙여 놓은 게 낫다고 합디다. 안심이 되더군요. 그때부터 하모니즘이 생겨난 겁니다. 하모니즘이 탄생하기까지 20년이 걸린 셈입니다.

―구상과 추상의 조화, 하모니즘을 창시할 당시의 평가는.

▲미국 국제통화기금(IMF) 본부에 큰 화랑이 있었는데 거기서 전람회를 했어요. 하모니즘 작품을 걸었는데 큐레이터가 시비를 걸어요. 왜 추상과 구상을 붙였냐면서 떼라고 했지만 난 모른 척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로 돌아오니까 미국보다 더했어요. 저것도 그림이냐고. "차라리 반쪽을 잘라서 팔아라"면서 악평을 쏟아냈어요. 그러나 미국에서 젊은 애들이 내 그림을 모방해서 (하모니즘)을 자기가 했다고 주장할 것 같아 1977년 하모니즘 선언문을 발표했어요. 내 그림은 이질적인 것을 조화 있게 합쳐 놓은 겁니다.

―누드를 많이 그렸습니다. 줄기차게 누드화를 그리는 이유는.

▲1954년 반도호텔에 벽화를 그려주고 받은 돈 3000달러를 들고 프랑스 파리로 갔어요.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한국과 달리 파리는 너무 평화로웠지요. 아카데미에 갔더니 학생들이 누드를 그리고 있어요. 그 순간 '이것이 바로 평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누드에서 평화를 찾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누드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내게 누드는 평화 그 자체입니다. (그가 그린 첫 누드화는 1949년 국전에 출품한 나부군상. 입선했지만 풍기문란으로 전시장에서 철거되고 예술과 외설의 논쟁을 부른 최초의 사건을 만들었다. 선린상고 관사에 두고 피란을 떠나 전쟁이 끝나고 와 보니 군인들이 나부 하나하나를 가위로 오려 가 캔버스 틀만 남아 있었다고 했다.)

―10일 열리는 초대전에 대형 추상화가 나온다.

▲이번에 나오는 그림은 1960년대, 1970년대에 만든 그림인데 500호 크기 광상곡은 내 추상회화 마지막 작품입니다. 색감을 완전히 자유스럽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작품을 추상까지 왔으니까 여기서 마무리 짓겠다 하고 한 작품입니다. 정말 정성을 쏟은 작품이에요. 색종이도 왜 붙였는가 하면 붙여도 조화가 된 만큼 필요한 것을 찾아서 집어넣고 했어요. 우유갑을 붙여 만든 강강수월래 모자이크풍 작품도 마찬가지로 몇 점 없어요. 하모니즘이 목적이어서 작품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서 여러 작품을 만든 거지요. 만들어 놓고는 다른 것 하고, 자꾸 새로운 걸 하려고 했지요. 예술은 창조입니다. 자꾸 새로운 것을 그려야 합니다. 그런 정신이 나를 살렸어요. 대작을 하면 참 힘들어요. 6개월이 걸리기도 하고 4년이 걸리기도 했어요. 그래서 작품이 많지가 않아요.

시간이 지나자 점점 기억이 또렷해진 김 화백은 "다시 한번 인타뷰를 하면 잘할 수 있겠는데…"라고 여유를 보였다. 옆에서 바쁜 부인에 대해 물었다. "부인?" "아니야∼!" (뜬금없는 말로 당황할 때) 김 화백이 말했다. "동반자야."

"동반자라고 하는 이유가 있어요. 1990년대 하모니즘 박해가 많았어요. 팔리지도 않고 저것도 그림이냐고 할 때 저 사람이 내 그림을 보고 역사적인 작품이라고 하는 겁니다. 처음 칭찬받는 일이었어요. (정년을 앞둔 노화백과 미대 1학년 장수현은 그렇게 만나 8년을 살다 1992년 결혼했다.) 해외 나가서 전람회를 하라고 하고 그 힘을 얻어 1990년대 해외전시를 많이 했어요. 작가 생활과 내 작품을 이해하고 격려해 주고 힘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동반자지요."

43년 차이 부인은 쑥스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쁘고 말고를 떠나서 절실한 것이 있어요. 장 관장도 이해관계를 떠나서 모든 걸 바치고 있어요. 솔직한 얘기로 자기 일을 했다면 대성해서 큰 작가가 됐을 겁니다.

하모니즘을 선전하고 보호하고 힘을 써 줘서 자신은 지금밖에 안 됐지요. 나에게 자기 생명을 바치고 청춘을 바치고 일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그걸 내가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김 화백이 일반에게 30년 만에 공개하는 1960∼70년대 추상화 작품전은 서울 삼청동 에프앤아트 스페이스에서 10일∼10월 16일 열린다. (02)725-7114

/hyun@fnnews.com미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