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칼럼] 국채는 칼보다 강하다/곽인찬 논설실장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0.10.05 18:15

수정 2010.10.05 18:15

“우리가 무역·재정적자를 기록하는 동안 그들은 우리 국채를 사모았고 본질적으로 우리의 뱅커가 됐다…미국의 경제 주권은 서서히 침식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현 국무장관이 2007년 봄 상원의원 시절에 한 말이다. 그로부터 3년 반이 지났고 이번엔 일본이 나섰다. 바로 지난달 노다 요시히코 일본 재무상은 “그들의 진짜 목적이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물론 중국을 지칭한다. 올 들어 중국이 갑작스럽게 일본 국채를 대량 매입한 이유가 궁금하다는 것이다.
노다 재무상의 발언은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 영유권을 놓고 양국 마찰이 막 번지는 시점에 나왔다.

국채는 미묘한 금융상품이다. 본질은 경제에 속하지만 때로 정치·외교적으로도 큰 파장을 낳는다. 미국이 발행한 국채 가운데 40%가량이 외국인 소유다. 1위 중국이 그 중 20%(8467억달러·7월말)를 차지한다. 진짜 의도가 어디에 있든 중국이 소유한 미 국채(TB)는 대미 협상에서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한다. 전주(錢主) 앞에서 쩔쩔매는 건 개인이나 국가나 마찬가지다. 만에 하나 큰손 중국이 돈을 한꺼번에 빼가면 미국 경제는 타격이 불가피하다. 그래도 유일 초강대국이니까 빚쟁이 주제에 중국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다른 나라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일본은 아직 미국보단 형편이 낫다. 국채대국 일본이 저렇게 버티는 것은 국채의 90%를 자체 소화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제로금리 아래서 달리 투자할 곳이 마땅찮은 일본 금융사들과 개인들은 별 수없이 국채를 찾는다.

이 시장에 중국인들이 명함을 내밀었다. 중국은 올 들어 7월까지 2조3000억엔어치의 일본 국채를 샀다. 국채시장이 워낙 커 아직 중국 비중(1.4%)은 미미한 수준이다. 일본 정부가 신경쓰는 건 속도다. 매입액이 거침없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영유권 분쟁 속에 아시아 맹주자리를 놓고 사사건건 경쟁해야 할 중국이 안방 국채시장의 큰손으로 등장하는 건 결코 반갑잖은 일이다. 미국의 속앓이를 잘 아는 노다 재무상으로선 미리 경고 휘슬을 울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중국 정부의 해외 국채 사냥은 포트폴리오 투자의 일환이다. 중국 정부는 달러에 편중된 해외 자산을 엔 또는 유로 자산으로 다변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달러 가치가 추세적인 하락세를 보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한국 국채도 투자유망 종목 리스트에 올라 있다. 8월 말 현재 중국이 보유한 한국 국채는 4조7400억원 규모로 외국인 소유 채권의 6.4%에 이른다. 나라별로는 미국-룩셈부르크에 이어 3위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올들어 증가 속도가 매우 빠르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 아직 규모가 작고 미·일과 달리 중국과 첨예한 갈등을 빚는 현안이 없어서일까.

겉으론 조용해도 내부적으론 대책이 서있어야 한다. 그러잖아도 한국 경제는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 작년 전체 교역의 4분의 1이 중국과 주고 받은 것이다. 무역흑자 대부분도 중국 덕을 봤고 배추까지 중국에서 들여온다. 이것만해도 큰 약점인데 국채시장까지 중국이 잠식하도록 놔두는 것은 어리석거나 순진하거나 둘 중 하나다. 벌써 시중금리와 환율은 ‘차이나 머니’의 영향을 받고 있다. 시장에선 한국은행보다 중국계 자금의 힘이 더 세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돈다. 왜 다른 나라는 놔두고 중국만 문제 삼느냐고?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을 보면 답이 나온다.

지난 주말 그리스를 방문한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국채를 더 사주겠다”는 말로 한 푼이 아쉬운 그리스인들의 환심을 샀다. 투자 수익도 챙기고 정치적 영향력도 확대하는 전형적인 국채 외교다.
최강국 미국도 쩔쩔 매는 판이다. 우리도 더 늦기 전에 마지노선을 긋고 관리할 필요가 있다.
국채는 종종 칼보다 강하다.

/paul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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