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한국의 장인을 찾아서] 악기장 ‘고흥곤’이 만들어내는 한국의 소리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1.06.09 14:06

수정 2014.11.06 16:21

"우리 국악기는 자연 그대로의 재료로 만들어서 자연의 소리를 내는 세계에서 드문 명기입니다. 중국과 일본도 자연 재료를 썼지만 최근 들어 서양악기의 영향을 받아서 현악기의 줄이 합섬이나 쇠줄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악기는 나무를 가공하지 않고 비바람을 맞혀 자연 그대로 삭히고 줄은 누에고치에서 뽑은 생명주를 꼬아서 만들기 때문에 맑고 투명한 소리가 나와요."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인 고흥곤 선생은 전통 현악기를 중심으로 연구·제작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내로라하는 국악인들이 일찍이 인정할 만큼 국악기계에서 가히 독보적인 존재다.

그는 단순히 겉모양만 예스러운 악기를 제작하는 게 아니다. 가야금, 해금, 아쟁, 거문고에 깊은 소리가 나도록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인간문화재 악기장이라는 이름보다 중요한 건 완벽한 소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완벽한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쏟는 시간과 열정은 일반인이 생각도 못할 만큼의 노력이 들어간다. 눈·비와 바람, 햇볕을 맞아 삭히고 건조된 재료를 바탕으로 천여 가지의 장인의 손길을 통해 진정 아름다운 소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는 누구나 알아보기 쉽게 대문짝만한 목판 '고흥곤국악기연구원'이 걸린 2층 건물이 있다. 이곳은 국악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문이 열려 있다.

"전통공예에 악기도 포함돼 있어. 이런 이유로 겉모습만 전통악기일 뿐 소리는 영 아닌 벙어리 악기들이 있거든. 악기는 다른 공예와 달라서 소리가 생명인데 말이지."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40여년간 악기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국내뿐 아니라 현해탄을 건너 정창원에 다니면서 고대 삼국시대 악기를 직접 보고 고증과 국악 전공 교수를 수소문해 사라진 국악기를 재현해냈다. 그중에 정악가야금(법금)이 대표적이다.

연구원에는 같은 가야금이지만 크기가 다른 가야금이 벽면에 둘러있었다. 몸집이 작은 것이 흔히 쓰이는 산조가야금이고 그보다 한 뼘가량 큰 것이 정악가야금이다. 정악가야금은 30년 넘은 조선 오동나무를 5년 이상 비바람·눈·햇볕을 맞히며 삭힌다. 산조가야금과 달리 통나무를 쓰기 때문에 소리가 멀리 나가 연주회용으로 많이 사용된다.

"산조가야금은 주로 민속음악을 연주하고 사랑채에서 많이 쓰였지. 정악가야금은 신라 이전부터 쓰였는데 후대로 올수록 연주 횟수가 줄어들었어. 악기도 19세기 말 산조가야금이 유행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데 여기저기 다니면서 정악가야금을 눈에 익혀 복원했어. 요즘 연주회장에서는 소리가 멀리 나가는 정악가야금이 많이 쓰여."

전북 전주가 고향인 그는 국악기 제조 분야의 첫번째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였던 김광주선생(1906∼1984년)의 집에 드나들었다. 그러다보니 스승이 국악기를 만드는 모습이 눈에 익었고, 고 선생은 딱히 국악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확고한 뜻을 품지 않았으나 자연스레 국악기 제작의 길로 접어들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악기 공정작업은 오로지 악기장의 '손'에서 이뤄졌다. 이 때문에 스승은 가야금 두세 대를 만들면 짊어지고 서울까지 가서 팔았다. 그러다 매번 오가는 것이 벅찼는지 스승은 서울로 아예 올라와 우리 악기를 만드는 데 전념했다. 제대 후 고 선생도 스승을 따라 상경해 본격적으로 악기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전통악기를 복원할 뿐 아니라 국악을 대중화하기 위해 개량 국악기를 완벽하게 만들어냈다. 가야금 연주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야금 대중화에 앞장섰다. 16현, 25현 등 줄을 늘리면서 소리를 연구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국악기 제작에서 정평이 났다. 가야금뿐 아니라 둔탁한 음을 내는 거문고도 맑은 소리를 낼 수 있도록 개량해 '다류금'을 만들었다.

"악기를 만들다 보니 소리에 예민해. 같은 종의 나무라도 똑같은 것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재료 성질에 따라 만드는 데도 조금씩 차이를 둬. 가장 중요한 것은 개량악기와 전통악기의 구분이야. 전통악기는 그대로 살리고 지켜야 하는 반면 현대인들이 (국악을) 편하게 들을 수 있도록 개량악기를 발전시켜야지."

고 선생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악기를 손보고 있었다. 봄가을엔 악기를 사거나 손보러 오는 손님이 많아 연구원에 꼼짝없이 붙어 있단다. 그의 문하생은 총 6명이다. 이들은 창신동이 아닌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또 다른 연구원에서 주로 머물면서 악기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악기를 매만지는 고 선생의 손이 희고 흠난 데가 없다. 그는 "땀에 손이 많아서 그렇다. 습하면 아무래도 살성이 좋다"고 말했다. 지금은 그래도 전체적인 톱질은 기계가 대신해줘 그나마 편안하지만 불과 20여년 전만 하더라도 직접 톱질을 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다치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그는 1년간 20점 남짓한 작품을 남긴다. 그중에서도 해금·가야금·거문고·아쟁 등 주로 현악기를 다룬다. 무엇보다도 현의 소리가 좋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제자와 직원이 있어 이제 쉴 법도 한데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 이는 고객들이 고 선생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전통공예 시장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장인들이 자생할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되고 장인들은 국가와 기업의 지원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국악기 제작을 이어나가기 위해 이론화 작업을 할 계획이다. 그만큼 그는 국악기 제작 분야에서 '악바리'다.
아울러 국악 공연을 찾아가고 매일 우리 음악을 듣는다.

"좋은 소리를 만들어서 대중들이 양질의 연주를 듣는 것이 악기장의 길이자 사명이지. 그러려면 좋은 소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자연스레 연주를 듣게 돼." /fncast
/파이낸셜뉴스 fnc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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