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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고개숙인 남자의 출근길/이응진 KBS 드라마 PD·문화칼럼니스트

박경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3.01.30 17:35

수정 2013.01.30 17:35

[fn논단] 고개숙인 남자의 출근길/이응진 KBS 드라마 PD·문화칼럼니스트

서울로 귀환해 오랜만에 늘 다니던 체육관을 찾아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새벽 6시에 주인과 회원이 말싸움을 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잘 아는 터라 입구에 삐죽거리고 섰는데 눈치를 챈 회원이 "그 따위로 하지 마"라고 고함을 치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나가버렸다. 남자는 일년 열두 달을 결석 한 번 하지 않는 개근 종결자다. 매일 새벽 6시 정각이면 철학자 칸트처럼 딱 나타나 딱 1시간 운동 후엔 전후좌우 보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칼같이 사라졌다.

내부수리를 한다고 1주일 휴장을 했던 모양인데 사전에 그 사실을 알지 못한 남자는 화가 났던 것이다.
"공고를 했어야지 이런 법이 어디 있나?" 그래서 '그 따위로 하지 마'라고 고함을 질렀던 것이다. "그 말 맞네"라고 맞장구를 쳤더니 주인은 공고문을 한 달간 대문짝만하게 출입구에 써 붙여 놓았었다며 하소연을 했다. "저 남자 별명이 뭐요, 공고 못보고 항의한 사람은 저 인간뿐이오." 우리 사이에 통용되는 그의 별명은 '고개 숙인 남자'다.

출근길에 다시 남자를 마주쳤다. 어딜 가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서 날 보진 못했다. "정말 고개 숙인 남자야!" 껄껄 웃으며 한참을 걷다가 뭔가 이상해 멈춰 섰다. 불현듯 나 또한 고개 숙인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회사와 아주 지근거리에 살아서 걸어서 출근하기도 하고 차를 타고 다니기도 한다. 벌써 18년째 그 길을 출퇴근 중이니 이젠 눈 감고도 다닐 수 있는 길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출근길에 관해 기억으로 남은 게 전혀 없다.

내 출근길을 소개하면, 아파트를 나와서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나란히 붙어 있는 일방통행 소로를 통과한다. 그 길엔 내가 출근할 즈음엔 아무도 없다. 초등생도 안 보이고 중등생도 볼 수 없다.

지금 같은 겨울이면 플라타너스 수십 그루가 양쪽으로 을씨년스럽게 도열해 있을 뿐이다. 다음으로 통과하는 몇몇 도로도 자동차만 몰려다닐 뿐 삶의 장면들이 거의 없다. 그런 무미건조한 길을 몇 번만 더 가면 내 일터가 나온다. 한 달에 40번, 1년에 480번, 18년째 9000번 가까이 이 길을 반복적으로 왕복했으니 어찌 보면 로봇이나 편집증환자처럼 단순 왕복운동을 하는 꼴이었고 결국은 고개 숙인 남자처럼 되고 말았던 것이다.

광대무변의 세상 온갖 변두리 삶을 만나는 잭 케루악의 '온 더 로드(On the road)'에 견줄 수야 없겠지만, 현대인의 출퇴근길도 대단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따져보면 1년에 식사 다음으로 많이 하는 일과가 출퇴근이다.

지친 일상과 교통체증 때문에 지옥길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그 길은 짧은 여행길이기도 하다. 길 위에서 마주치는 타인들의 삶에서 엿보는 짧지만 강렬한 이미지와 느낌들은 더러는 내 삶의 안주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삶을 향한 실마리를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늘 보는 풍경은 '풍경'이 아니며 늘 마주치는 상황은 '상황'이 아니다.
한강을 아침 저녁으로 대하면 단지 물(水)이 된다. 새해엔 출퇴근길을 3방향 4방향으로 늘려 볼 생각이다.
구두도 많이 닳고 기름값도 더 들겠지만 짧은 여행도 이 길 저 길 고개 들고 다니다 보면 보고 느끼는 것도 세 배, 네 배 늘어날 것이다. 사내란 이래저래 고개 숙인 남자여서는 안 되는 법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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