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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버리기와 채우기/정재창 PSI 컨설팅 대표

박경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3.02.04 17:14

수정 2013.02.04 17:14

[fn논단] 버리기와 채우기/정재창 PSI 컨설팅 대표

대학원 은사이자 세계적 조직개발 컨설턴트이기도 한 마샥(Marshak) 박사를 초청해 '변화관리' 공개세미나를 준비하던 20년의 전 일이다. 교육 참석자용 교재 번역을 시켰더니 내용 중에서 언두(Undo), 언런(Unlearn)을 '미시행' '미학습'으로 번역을 해 왔는데 문맥상으로 봤을 때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영한·영영사전을 찾아 봐도 아예 단어가 나오지 않아서 일단 영어를 그대로 둔 채 교재를 만들었는데 나중에 강의를 들으면서 Undo는 그동안 하던 행동을 버리거나 없애는 것이며 Unlearn 역시 학습한 내용을 버리고 폐기하는 것이라는 뜻을 알게 되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21세기의 문맹이란 종래의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습(Learn)하고, 학습한 내용을 버리고(Unlearn), 새로운 것을 배우지(Relearn) 못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알려지면서 지금은 Unlearn이라는 단어가 네이버 검색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는 단어가 되었다.

최근 경영자들의 학습 욕구가 높아진 덕인지, 아니면 배우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초조함이나 강박관념 때문인지 인문·철학·감성 등을 주제로 한 임원 조찬회마다 참석자들이 500명 이상씩 넘쳐나게 모인다. 오전 7시만 되면 빈 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이른 시간에 뭔가 채워보겠다는 생각으로 모이지만 그들 대부분이 새로운 것을 채우기 위해서 필요한 '비움'과 '버림'의 중요성을 깨닫고 비우고 버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새로운 것을 채우러 열심히 다니면 다닐수록 들어갈 빈자리가 없다보니 리러닝(relearning)이 불가능해져서 도리어 학습이 되지 않는 역설적인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

바로 몇 달 전 주 전체 인구가 60만명도 되지 않는 버몬트 주의 작은 산간 도시인 스토라는 시골마을의 리더십 교육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욕망과 조급함 때문에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생명과 일·사랑·가족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감사로 가득 차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던 순간을 통해 새로운 학습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학습이란 진정한 나를 만나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일부를 비우고 버림으로써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는 소중한 지혜를 터득했다. 요즘도 가끔 그곳에서 사온 기념품 벽걸이에 새긴 '값싼 와인을 마시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다(Life is too Short to drink cheap wine)'라는 문구를 보며 마음을 다스린다.


며칠 후면 설이다.

이번 설에는 새해에 새로운 것들이 들어와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그동안 집착하고 소중히 했던 것들을 일부러 비우고 버려보는 노력을 해 보면 어떨까.

비록 살림은 넉넉하지 못하지만 필자가 부러워하는 멋있고 참되게 사는 두 친구에게 '느림'을 통해 나를 만날 수 있고 욕심과 조급함을 털어내기에 적합한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양수리 수종사, 소양호 주변 청평사길, 횡성 청태산, 운산(서산) 개심사(開心寺), 서편제의 배경인 청산도, 순천만, 보길도, 고창 선운사, 도산서원, 문경 새재 등을 추천해 주었다.


연휴에 이 중 가까운 곳에 가서 비움과 버림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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