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 칼럼]

율곡이 죽자 백성은 울었다/논설실장

'선조(宣祖)수정실록'은 전한다. "동료 관리들과 성균관 학생, 말단 군졸, 시장 상인, 노비와 하인들까지 달려와 통곡했다. 궁벽한 마을의 백성들도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백성들이 복이 없기도 하다' 하였다. 발인하는 날 밤에는 횃불이 하늘을 밝히며 수십리에 걸쳐 끊이지 않았다."('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이정철 지음)

율곡 이이(1536~1584)가 죽었을 때의 풍경이다. 수정실록은 다시 말한다. "이이는 서울에 집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집안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다. 친구들이 수의를 마련하고 부의를 거두어 장례를 치른 뒤 조그만 집을 사서 가족에게 주었으나 그래도 가족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왜 '수정'실록일까. 이이는 평생을 동서(東西) 화합에 힘썼다. 당시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렸다. 병조·이조판서를 지낸 이이는 서인에 속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이 즉위한 뒤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북인의 영향 아래 쓰였다. 원 실록에서 이이의 죽음은 '이조판서이이졸'(吏曹判書李珥卒) 단 7자뿐이다. 반면 인조 때 서인이 다시 쓴 수정실록은 이이의 인간됨을 자세히 전한다. 당쟁은 실록까지 갈라놓았다.

백성은 왜 이이의 죽음에 울고불고 했을까. 율곡의 정치사상을 한마디로 줄이면 민생 또는 안민(安民)이다. 그는 뜬구름 잡는 형이상학을 배격했다. 대신 피부에 와닿는 제도개혁과 실천을 중시했다. 지역 특산물을 나라에 바치는 공납(貢納)을 수미법(收米法)으로 바꾸자고 주장한 것이 좋은 예다. 공납은 국가 재정의 원천이었으나 백성의 원성을 샀다. 탐관오리와 결탁한 중간상이 공물을 대신 납부한 뒤 폭리를 취하는 방납(防納) 등의 폐해가 컸기 때문이다. 공물을 쌀로 통일하면 이런 작태를 줄일 수 있다. 나중에 수미법은 조선 최대의 개혁으로 꼽히는 대동법(大同法)의 모태가 된다.

이이의 개혁안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좁게 보면 율곡은 실패한 정치인이다. 동인은 율곡을 나라 일을 그르친 소인으로 탄핵했다. 그러나 넓게 보면 이이는 성공한 정치인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백성이 제발로 찾아와 조문한 예가 두 번 있다. 그중 한 명이 이이다. 백성이 사랑한 정치인에게 실패 낙인은 어울리지 않는다.

다른 한 명은 잠곡 김육(1580~1658)이다. 인조·효종 때 우의정·영의정을 지낸 김육은 율곡의 아바타 같은 존재다. 그는 민생을 중시한 율곡의 정치철학을 고스란히 계승했다. 대동법 시행을 앞두고 효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잠곡은 "신이 이 법을 시행하려는 것은 선철(先哲)의 정책을 따르려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선철은 물론 이이를 가리킨다.

김육이 죽자 대동법을 처음 시행한 충청도 백성들이 특히 슬퍼했다. 그들은 부의를 전하려 했으나 상주가 완곡히 거절하자 대신 비석을 세웠다. 현재 경기도 평택에 있는 대동법시행기념비가 바로 그것이다. 이 비의 원래 명칭은 '조선국 영의정 김공육 대동균역 만세불망비(朝鮮國 領議政 金公堉 大同均役 萬歲不忘碑)다. 대동법으로 세금을 고르게 해준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취임식에서 국민행복시대를 약속했다. 국민행복이란 율곡·잠곡이 말한 안민의 21세기적 표현이다. 사실 집권 세력이 제 욕심을 버리고 백성을 돌본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무능하거나 행동이 따르지 않을 때가 많다.
대한민국의 진보는 무능하고 보수는 제 잇속만 챙긴다. 권력과 부를 거머쥔 자들의 회전문은 쌩쌩 잘도 돌아간다. 이런 세상에서 국민은 불행하다. 선현들이여, 박 대통령에게 국민행복시대를 열어갈 지혜를 주소서.

paulk@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