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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벼룩시장에서 본 낯짝/이응진 KBS 드라마 PD·문화칼럼니스트

박경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3.02.27 17:05

수정 2013.02.27 17:05

[fn논단] 벼룩시장에서 본 낯짝/이응진 KBS 드라마 PD·문화칼럼니스트

화장실 변기가 고장 났다. 변기통이 아니라 받침대에 문제가 생겼다. 소변을 보려고 세워 놓으면 용무 중에 슬쩍 내려앉아 소변이 튀어버린다. 한 손으로 받침대를 잡고 한 손으로만 일을 보자니 이번에는 더 큰 낭패가 발생했다. 주변에 물 한 바가지만 뿌려주면 만사 오케이건만, 화장실이란 게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달라 그냥 홱 돌아서버리니 아내에게 '소변도 못 가리느냐'고 면박을 당한다. 여자란 서서 소변 볼 일이 없으니 본인 입장에서만 생각해서 '겨냥 잘못'으로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인가? 사실 아내의 그런 태도는 너무 많아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다. 하긴 아들놈도 마찬가지다. 녀석은 자기중심에 한 술 더 떠서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데 키 188㎝에 큰 바위 얼굴을 가졌는데도 하는 짓은 전혀 낯짝이 없는 인간 같다. 자기는 내 비싼 옷을 허락도 없이 불쑥 입고 나가면서 내가 어쩌다가 자기 옷을 한 번쯤 빌리려면 난리가 난다. 얼마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가벼운 외국 출장길에 편리한 옷 하나를 빌려달라 했더니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출장지에서 사라고 했다. 이건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옷 산 돈이 어디서 났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출장을 끝낸 후 야속함도 삭일 겸 쇼핑을 나갔다가 마침 벼룩시장을 마주쳤다. 여행지 중에 꿩 먹고 알 먹는 곳 하나가 그런 전통시장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문화와 다른 풍속을 가진 이들의 삶의 속살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참맛이 아니겠는가. 마침 잘 되었다 싶었다. 값싸고 추억에 남을 물건 하나를 구해서 미운 아들에게 자랑도 할 겸 시장 구석구석을 누볐다. 별별 물건들이 다 나와 있었고 어떤 것들은 쓰레기 수준인데도 버젓이 진열돼 있었다. 묘하디 묘한 물건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저쪽에 신발 한 짝이 눈에 들어왔다. 어! 그 유명한 '루이비통' 한 켤레가 놓여 있는데 이 브랜드로 말하자면 동양 여성들이 흠모해 마지않는 명품 중 명품 아닌가. 이젠 짝퉁이 원산지까지 진출하는구나 싶어서 쓴웃음을 지으며 얼른 물건을 들고 살펴보니 햐, 이건 짝퉁 아닌 진품이 틀림없었다. 땡잡았다 싶어서 가격을 물어보니 닳고 닳은 듯해 보이는 장사꾼이 '100달러'라고 외쳤다. 벼룩시장 물건이 웬 100달러, 진짜라도 너무 비싸다 싶어서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뜨려다가 문득 생각해 보니 이놈 진품은 한국 백화점에선 100만원인데 싶어서 얼른 신어봤다. 근데 너무 컸다. 커도 턱없이 커서 보트 탄 듯 헐렁헐렁 290㎜쯤 될 듯했고 2m쯤 되는 거인에게나 맞을 듯했다. 그래, 그러니 벼룩시장에나 덜렁 나와 앉아 있지.

휙 던져놓고 다른 명품을 찾으려 이쪽저쪽을 살피며 걷는데 정말 벼룩이 튀어나올 지경으로 켜켜이 손때 묻은 것들이 많기도 하고, 또 그런 걸 버리지 않고 간직해온 사람들이 신기하기도 하다. 긴 골목길을 끝까지 돌았는데도 맘에 들어오는 것이 없다. 이국적인 풍경을 눈 구경만 잘하고 돌아서는데 뭔가 번쩍 생각이 났다. 그래, 맞다 맞아! 나는 뛰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지갑을 찾았다. 달음박질하면서도 지갑에서 100달러를 꺼낼 수 있었다. 그래, 낯짝 없는 내 아들놈은 키 188㎝에 290㎜ 구두를 싣는다.
자기중심적인 그 꺽다리 놈에겐 그 구두가 딱 맞다. 세계적 명품이 있던 곳에 도착해서 돈을 내밀려는 순간 그곳엔 아무것도 안 보였다.
구두가 있던 바닥에선 벼룩처럼 내 자기중심적 낯짝이 튀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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