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 칼럼]

박근혜 복지와 대동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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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에 살던 납세자들에게 '인정 넘치는 사회'는 끔찍한 사회였다. 인정(人情)은 벼슬아치들에게 몰래 주던 선물을 뜻한다. 세리에게 주는 비공식 수수료다. 이런 폐단을 없애려 나온 게 대동법(大同法)이다. 대동법은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고 파탄에 이른 나라 재정을 곧추세우려는 조세재정개혁이었다.

조선의 재정은 조·용·조를 기초로 했다. 조(租) 즉 전조(田租)는 땅에 물린 세금, 용(庸)은 노동력, 조(調)는 현물로 내는 지역 특산물이다. 초기엔 전조가 재정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점차 특산물, 곧 공물(貢物)의 비중이 높아졌다. 임금에겐 따로 진상(進上)이 있었다. 특히 공물을 걷을 때 탐관오리들이 활개를 쳤다.

공물 수취를 맡은 관리는 특산물의 질을 트집 잡아 퇴짜를 놓았다. 이를 점퇴(點退)라 했다. 트집을 안 잡히려면 공물 대납을 전문으로 하는 브로커에게 맡겨야 했다. 브로커는 제 몫을 떼고 관리한테 줄 뇌물도 따로 마련했다. 상납 사슬의 꼭대기엔 뒷배를 봐주는 고위 관료가 있었다. 모든 부담은 백성에게 돌아갔다. 공물 납부·수취를 둘러싼 비리를 통틀어 방납(防納)이라 한다.

대동법이 인조·효종·현종대에 등장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17세기를 기점으로 조선은 전·후기로 나뉜다. 임진왜란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정묘·병자호란이 잇따라 터졌다. 중국에선 명(明)이 무너지고 오랑캐로 얕잡아 보던 청(淸)이 들어섰다. 청은 수시로 조선에 대규모 파병을 강요했다. 미곡 20만섬을 요구하기도 했다. 나중에 양이 절반으로 줄긴 했으나 운반비용 5만섬을 합치면 조선의 1년 전세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얄미운 청나라 사신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욕심껏 챙겨갔다. 가뭄도 잦았고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백성은 백성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죽을 맛이었다.

조세재정개혁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인조 때 삼도대동법, 효종 때 호서·호남대동법, 현종 때 경기대동법이 잇따라 실시된다. 고을 전체가 경작지 규모에 비례해서 공물을 고르게 분담(대동·大同)하고, 공물을 쌀(대동미)이나 무명(대동포)으로 대신 내도 됐다. 기존 제도 아래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던 땅부자 토호세력, 수탈을 일삼던 탐관오리들이 강하게 반발했으나 대세를 막진 못했다. 조선 왕조는 잦은 외침 등 숱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세계 역사상 드물게 500년 장수했다. 그 바탕엔 바로 대동법과 같은 개혁이 있다.

'대동법-조선최고의 개혁'을 쓴 역사학자 이정철은 대동법의 재정사적 의미를 양입위출(量入爲出)에서 찾는다. 양입위출이란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로, 정해진 양만큼 걷고 걷은 만큼 쓴다는 뜻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양입위출을 재정원칙으로 삼았다. 하지만 원칙만 그랬을 뿐 대동법 이전의 조세제도는 마구잡이 징수로 원성을 샀다.

대동법은 원칙을 바로잡으려는 세제개혁이었다. 최근 동티가 난 박근혜정부의 세법개정안도 세제개혁이다. 당대의 고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두 개혁은 일맥상통한다. 차이는 복지다. 박근혜정부는 걷은 만큼 쓰지 않고 쓸 만큼 걷으려 한다. 우리 역사상 국가가 '자애로운 손'이 된 적이 없다. 복지는 가족 또는 기껏해야 마을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속담에 수천년의 정서가 녹아 있다.

박근혜정부의 복지 공약은 거대한 실험이다. 수천년 정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중산층을 쥐어짜는 첫 시도가 퇴짜를 맞은 건 당연해 보인다. 그럼 앞으로 복지는 누가 책임지나? 가족? 물 건너갔다. 마을? 택도 없다. 남은 건 국가다.

납세자를 상대로 이 엄연한 현실을 설득하는 데 박근혜 복지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정철은 "17세기 조선이 국내외적으로 거대한 체제의 전환을 요구받았던 것처럼, 지금의 한국 사회도 거대한 전환기에 놓여 있는 듯이 보인다"고 말한다. 동감이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