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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개인의 악덕은 사회의 이익?

박경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3.08.26 16:42

수정 2014.11.04 08:44

[fn논단] 개인의 악덕은 사회의 이익?

중세 기독교 사회로부터 근세 자본주의로 넘어가던 전환기, 돌직구를 던져 시대 변화를 선도한 인물이 있다. 18세기 초 자본주의의 물결로 유럽 도시의 개인들은 돈벌이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도 금욕과 절제를 최고의 선으로 중시하는 중세 종교적 가치관을 벗어나야 한다고 감히 주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의사 겸 철학자이자 시인인 버나드 맨더빌은 1714년 영국에서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이란 부제가 붙은 '꿀벌의 우화'라는 시집을 펴냈다. 이 책은 커다란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종교와 미덕을 깎아내린 '인간 악마'로 온갖 욕을 들어야 했지만 경제학의 단초를 제공했다.


맨더빌의 풍자시는 이렇다. 많은 벌이 사치를 부리며 넉넉하게 사는 벌집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의 허영과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며 쓸데없는 물건들을 만들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땀 흘려 일할 때 어떤 이는 주식투자로 힘들이지 않고 큰돈을 벌었다. 변호사는 싸움을 붙여 돈을 벌고 의사는 환자 건강보다 돈과 명예를 생각했다. 성직자는 엉터리가 많았고 용감한 병사들은 전쟁 불구가 돼 버림받지만 싸움터에 나타나지도 않은 자는 월급만 갑절로 받았다. 신하는 임금을 속여 녹봉을 채어갔고 재판관은 황금에 매수돼 공정성을 저버렸다. 사회 구석구석이 악으로 가득 찼지만 그래도 전체로 보면 낙원이었다. 돈이 넘쳐나고 삶은 풍족했다. 탐욕은 해로운 악이지만 방탕과 사치는 수백만명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직자가 목청 높여 도덕을 외치고 나오자 신들이 화가 나서 시끄러운 저 벌집에 속임수를 없애리라 다짐했다. 그 결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정치인에서 어릿광대에 이르기까지 위선의 탈이 벗겨졌다. 재판관 몇몇을 목 매달고 나머지를 풀어주자 자물쇠, 쇠창살을 만들던 대장장이와 옥졸들이 필요 없어졌다. 솜씨 좋은 벌이 아픈 벌을 처방해주니 의사가 필요 없어졌다. 신하가 녹봉에 맞춰 검소한 집에 수수한 옷을 입고 살자, 집값이 떨어지고 집 짓는 기술자와 옷장수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벌들이 사치를 멀리하면서 회사와 공장은 문을 닫게 됐다. 일자리를 잃은 벌들이 벌집을 떠나자 적이 쳐들어와도 막아낼 수 없었다.

여기서 악덕이란 개인의 이기심, 욕망을 말한다. 남보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하는 욕심은 절제와 절약이라는 미덕과는 상반된다. 맨더빌이 문제 삼은 것은 사람들의 위선이었다. 사람들은 한편에서 부자가 돼 여유 있고 편한 생활을 꿈꾸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평등하고 금욕적인 도덕률을 강조했다.

맨더빌의 충격적인 문제 제기를 슬기롭게 설명한 사람이 애덤 스미스였다. 그는 '국부론'에서 "우리가 매일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 때문"이라면서 "개인의 이기심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낳는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경제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는 '부자 되세요'란 말이 덕담인 세상에 살고 있다.
비록 과장된 풍자로 이질감은 있지만 경제의 심연을 엿보려면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를 한번쯤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이호철 한국거래소 부이사장·파생상품시장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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