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 칼럼]

시리아 요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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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무함마드는 홍해 연안의 국제도시 메카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사람들에게 유일신 '알라'만을 믿고 따를 것을 권했다. 다신교도이던 당시 아랍인들에게 무함마드는 손톱 밑 가시 같은 존재였다. 부족장들은 그가 잠자는 틈을 타서 없애기로 했다. 이를 눈치 챈 무함마드는 한밤중 메카를 몰래 빠져나갔다. 무함마드 일행이 메카 인근 동굴에 숨었을 때 암살대가 쫓아왔다. 그때 거미 한 마리가 동굴 입구에 거미집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거미줄을 본 추적대는 동굴 안에 아무도 없을 거라 여겨 그냥 지나쳤다.

무함마드의 탈출을 도운 또 다른 일등공신은 그의 사촌동생 알리다. 알리는 무함마드가 집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양으로 사촌형의 침대에 누웠다. 여차하면 형 대신 죽을 수도 있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암살자들은 알리를 살려준다. 무함마드가 박해를 피해 메카에서 북쪽으로 400㎞ 떨어진 메디나로 이주한 사건을 헤즈라라 한다. 이슬람력은 이 사건을 기준으로 헤즈라 이전(BH)과 헤즈라 이후(AH)로 나뉜다. 서기(AD)로 따지면 622년의 일이다.

나중에 알리는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혼인한다. 이로써 서른 살 차이가 나는 무함마드와 알리는 사촌이면서 동시에 장인·사위가 된다. 무함마드에겐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사위가 더욱 각별하다. 게다가 헌헌장부 알리는 무함마드의 둘도 없는 충복이었다. 전쟁터에서 선봉장은 으레 알리의 몫이었다.

무함마드가 죽자 알리가 후계자 1순위로 떠오른 건 당연했다. 그러나 예언자의 뒤를 잇는 제1대 칼리프의 영예는 무함마드의 친구에게 돌아갔다. 2·3대 칼리프의 자리도 다른 이에게 넘어갔다. 알리를 무함마드의 혈통을 잇는 유일한 계승자로 여기던 알리의 지지자들은 분개했다. 알리를 추종하는 무리 즉 시아(Shia)파가 여기서 생겼다. 그 대척점에 수니(Sunni)파가 있다.

알리는 제4대 칼리프가 된다. 하지만 그는 적대세력과 타협을 시도하다 같은 편 급진파의 손에 목숨을 잃는다. 알리의 유지는 차남 후세인에게 이어진다. 후세인은 수니파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순교'한다. 오늘날에도 전 세계 시아파 무슬림들은 후세인의 순교를 애도의 날로 기념한다.

시리아는 인구의 60%가 수니파다. 하지만 권력은 시아파의 분파인 알라위파(12%)가 잡고 있다. 알라위(Alawi)는 알리의 추종자란 뜻이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하페즈 알아사드 전 대통령(재임 1971~2000)과 그의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 현 대통령이 그 중심에 있다.

2011년 '아랍의 봄'은 시리아로 번졌다. 대립은 내전으로 치달았다. 유엔 추산에 따르면 지난 2년간 사망자만 10만명 이상, 난민은 수백만명에 이른다. 그 뿌리는 수백년 묵은 종파 간 갈등에 있다. 시아파 이슬람 국가인 이란이 시리아 정부를, 사우디아라비아 등 수니파가 주축인 아랍연맹이 반군을 지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세계의 경찰 미국은 고민에 빠졌다. 시리아 정부군은 수도 다마스쿠스 인근 수니파 밀집지역에 독가스 사린 폭탄을 터뜨린 의혹을 사고 있다. 화학무기는, 좀 우습지만 전쟁 '에티켓'에 어긋난다. 미국이 정부군을 치면 반군을 돕는 꼴이 된다. 그런데 반군 진영은 알카에다 등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소굴이다. 1980년대 미 중앙정보국(CIA)은 소련(현 러시아)과 싸우던 아프간 탈레반 반군에 무기를 댔다. 그 탈레반이 미·아프간 전쟁에선 미국에 총을 들이댔다. 같은 잘못을 시리아에서 되풀이할 수 있다.

한국은 미국에 응징을 촉구하고 있다. 민간인에 대한 화학무기 공격을 모른 척 할 경우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보낼 수 있다는 게 한국의 우려다. 존 케리 국무장관과 척 헤이글 국방장관도 같은 논리를 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7일을 시리아 평화를 위한 단식과 기도의 날로 선언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서방 측에 신중한 군사개입을 주문했다. 참 중동은 요지경이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