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13’ 프로젝트]

(4부·5) “천천히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

오용근 교수(기초과학연구원(IBS) 기하학 수리물리 연구단장)가 수학이나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등장하는 문제를 그래픽이나 도형 등의 시각적 모델로 바꾼 후 연역적 사고와 수학적 계산을 통해 물리 고전역학 중 하나인 해밀토니안 역학의 방정식을 설명하고 있다.

"자신이 하는 분야를 넘어 소통을 통해 새로운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장 손에 잡히는 연구성과에 집착할 게 아니라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려는 정신이 필요하고 사회에서도 이를 인정해주는 관용이 필요하다. 100년 전에는 어떻게 쓰일지 몰랐던 수학의 원리가 지금의 디지털 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기초과학연구원(IBS) 기하학 수리물리 연구단장인 오용근 포스텍(POSTECH)석학교수는 현재 기하학과 수리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분야인 사교 위상수학 및 기하학(Symplectic topology and geometry)에서 독창적인 연구 활동으로 이 분야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세계적인 수학자다.

지난 2006년 한국인 최초로 국제수학자대회(ICM)에서 기하학 분야 초청연사로 선정됐고 수학과 물리학을 연결하는 거울 대칭이론과 저차원의 위상 수학발전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 세계 최대 수학단체인 미국 수학회(American Mathematical Society)의 초대 펠로로 선정됐다.

27일 오용근 교수를 만나 한국 기초과학 육성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조언을 들었다.

―현재 수행 중인 연구 분야에 대해 소개한다면.

▲어떠한 문제가 눈앞에 놓였을 때 항상 수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빠르고 간단하게 풀어낼 수 있는 거냐이다. 물리 고전역학에서 운동방정식을 푸는 데 복잡하고 어려운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뒤에 숨겨진 기하학적 구조를 발견하면서 더 빠르고 쉽게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이것이 사교 기하학이다. 자연 현상에서 보이는 물체를 도형의 원리로 파악하고 인간이 가진 시각적 분석력과 연역적 사고를 더해 더 빠르고 쉽게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 바로 사교 기하학이고 이는 물리학에 있어서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을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됐다. 이게 내가 연구하는 분야다. 최근 물리학계의 관심사 중 하나는 미시적인 소립자 간 힘의 역학관계 현상이 거시적인 실생활의 물리현상에 영향을 주는 과정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양자화인데 우리 연구단은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수학적인 구조를 파악하고 어떠한 연결관계를 갖는지를 찾는 융합연구를 한다.

―왜 학자의 길을 선택했나.

▲어릴적 내가 태어난 서울 창신동. 가정 형편은 어려웠다. 장난감을 갖고 놀아야 할 어린 시절 딱히 갖고 놀 게 없었다.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배울 형편도 안 됐고 그러던 중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던 형님이 풀던 수학참고서를 발견했다. 집에서 심심할 때마다 문제를 풀어봤는데 재밌는 거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푸는 게 좋았다. 그렇게 형님들의 중고등학교 수학참고서를 풀다보니 자연스레 수학이 취미가 됐고 대학 전공으로도 이어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수학자의 길로 들어설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가정 형편이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취직할 생각이었고 유학갈 생각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데 2학년 때였나. 우연히 학교 정문에서 지도교수님을 만나 강의실까지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그때 교수님께서 내게 유학 얘기를 꺼내셨다.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유학생활에서 조교 등을 하면서 장학금을 받고 다닐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한줄기 빛처럼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그 이후로 유학을 가 공부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 오 교수의 카페 같은 연구실.
―연구를 하면서 가장 어려울 때와 기뻤을 때는.

▲미국 유학시절 마지막 박사 졸업논문을 준비할 때였다. 한계에 부딪혔다. 한국에서 교육받은 소위 우등생이 가진 결정적인 결함이랄까. 저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수많은 한국의 유학생들이 다 그랬을 것 같다. 문제를 푸는 능력과 새로운 리서치를 하는 능력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는데 이를 넘어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학생시절을 보내면서 빠르게 문제를 푸는 것들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박사 공부를 하면서도 빠른 시일 내에 좋은 연구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잘 안되는 것이다. 문제 푸는 건 반복적인 연습과 머리가 좋으면 된다. 그러나 연구는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것이다. 문제조차도 내가 만들어서 해결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맨 처음 남들보다 빨리 박사 자격 시험을 1년 만에 통과했을 때는 조기졸업을 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는데 논문이 통과하는 데 4년이 걸렸다. 총 5년의 시간이 걸리면서 더뎌지니 마음도 답답하고 막판에는 '과연 내가 졸업할 수 있을까' 확신이 없었다. 마지막에 지도교수에게 논문을 인정받는 순간 가장 기뻤다.

학문을 하면서 누구나 이런 한계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 댐에 물이 차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순간인데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과 즐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연구자는 '오리무중' 상태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미국에서 오랜 연구생활을 했는데 한국과 미국의 연구환경의 차이가 있다면.

▲지난해 IBS 단장이 되면서 돌아왔으니 한국에 다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래서 잘 모른다. 하지만 성과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크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러한 기대는 지나치면 연구자에게 큰 스트레스가 된다. 무언가에 닦달받아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연구를 하게 되면 자유롭게 자신의 연구를 펼쳐나가기 힘들다. 물론 정부나 세금을 내는 국민 입장에서 당장의 가시적 성과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좋은 연구가 나오는지 알 필요가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은 오랜 역사를 통해 과학자나 수학자가 연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역사적으로 알고 있다. 지금 수행한 연구가 당장 쓰이지 않아도 역사적 과거의 경험에 비춰볼 때 몇 십년 후에 쓰인다는 걸 체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연구자들에게 투자하되 내버려두는 분위기다.

수학의 경우를 보자. 현재 이 시대는 인터넷 시대, 디지털 시대다. 그런데 이 시대를 가능케 한 수학 알고리즘 연구는 100년 전에 완성됐다. 당시에는 무엇에 쓰일지 알 수 없는 막연한 연구성과였을지 모르지만 100년의 시간이 흘러 지금 꽃을 피운 것이다. 당장의 기초 연구성과를 일반 대중이 향유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걸 염두에 두고 인내심 갖고 내버려두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우리나라 기초과학의 발전과 노벨상 수상을 위해 선행돼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나라는 원천기술이 없다. 전기나 전자 분야에서 세계적 위치에 있지만 그 역시 우리나라가 자체적으로 개발한 원천기술이 아니지 않나. 선진국에서 나온 과학적 원리를 차용해 갖다쓰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리드하는 능력은 실제적으로 없다고 본다. 남이 시작해 실용화의 가능성이 보일 때까지 위험부담을 계산하고 눈치를 보다 뛰어들어 세련화하는 일을 잘했다.

그런데 정말 기초과학을 육성하기 원한다면 그런 전략적 마인드를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 길을 내듯 맨땅에 헤딩하려는 자세가 필요한데 그렇지 못하다. 진정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 세계를 리드하려면 시행착오를 겪을 자세를 갖는 것이 필수적이다. 처음 개척하는 일에서 한 번에 성공에 이르기를 기대하는 것은 요행이다. 단시간 내에 이뤄질 일은 아니다.

이를 위해 궁극적으로 교육 시스템과 사회 구조가 전체적으로 바뀌어야 하고 결국 개개인의 사고가 바뀌어야 한다. 다행인 것은 우리 사회가 문제를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작점이다. 결국 학교교육을 개혁하고 입시 위주 교육에서 벗어나 공부든 그 외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연구 결과도 연구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때 가장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근데 결과물과 목적만을 생각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잡으려 하니 안타깝다. 연구자가 된다는 것은 사회에서의 인정과 안정된 것을 추구하기보다 불안정해보여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도 중요하다. 특히 최근 거대한 연구 성과가 학자들의 교류와 소통에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외국의 유수한 연구소들은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열린 공간 구축에 나서고 있다.

열린 공간과 환경에서 연구자들이 서로 대화할 때 가장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영역에서는 생각이 한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세계적인 교류를 활성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IBS 기하학 수리물리 연구단은?

오용근 교수가 이끌고 있는 기초과학연구원(IBS) 기하학 수리물리 연구단은 순수수학과 이론물리 간 상호작용이 중요시 되는 세계적 학문추세를 반영해 순수수학인 사교기하학(Symplectic geometry)과 수리물리분야의 핵심인 양자장 끈이론을 융합하는 연구를 진행한다.

기하학은 수학이나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등장하는 문제를 그래픽이나 도형 등의 시각적 모델로 바꾼 후 연역적 사고와 수학적 계산을 통해 해결하는 학문이다. 사교기하학은 물리 고전역학 중 하나인 해밀토니안 역학의 방정식을 연구하는 데 있어 사교구조라는 기하학적 공간을 이용해 푼다.

사교기하학은 물리학의 양대 분야인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을 연계시켜주는 역할을 하는데 분자와 원자, 전자와 같은 작은 크기를 갖는 계의 물리학을 연구하는 양자역학에서 양자장 끈이론은 일정한 파장을 가진 끈 형태의 소립자 간 힘의 상호작용을 연구한다.

이러한 수학과 이론물리 융복합연구를 위해 연구단은 두 학문분야를 포괄하는 전공자들로 구성된 그룹리더와 IBS 정년트랙 조교수 등이 한 테두리 안에 묶여 유기적 상호작용이 극대화된 새로운 형태의 연구소로 구성됐다.



IBS 기하학 수리물리 연구단은 포항공대의 캠퍼스 연구단으로 수학과뿐 아니라 물리학과, 아태이론 물리연구소(APCTP) 교수진과의 활발한 연구교류를 통한 시너지 효과를 이루고 구성원 간 학문적 교류를 통해 분야 간 벽을 허물고자 한다.

이를 통해 대역해석학과 사교기하학, 동역학, 위상수학, 수리물리의 높은 단계에서 통합이 필요한 '사교대수위상'이라는 새로운 수학분야를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 양자장 끈이론의 수학적 토대를 마련하는 등 순수 수학 및 이론물리에의 여러 응용을 모색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팀장 윤정남 정명진 김경수 임광복 이병철 박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