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 칼럼]

한국 2013년 겨울

요즘 케이블TV 드라마 '응사'가 인기다. 원제는 '응답하라 1994'인데 딸애와 얘기할 때는 '응사'라고 해야 폼이 난다. 무대는 서울 신촌의 연세대학교 앞 하숙집. 하숙집 주인 딸로 나오는 고아라(나정 역)가 두 남자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다. 시청자들도 나정이 과연 누구와 결혼할지 덩달아 궁금하다. 행복한 시대의 행복한 고민이다.

1994년 한국 경제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렸다. 10대들이 '서태지와 아이들'에 열광할 때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전년비 8.8%를 기록했다. 성장률은 1995~96년에도 7~8%대로 좋았다. 1996년 한국은 꿈에 그리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된다. 지구촌 부자클럽의 정식 멤버가 된 것이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도 쑥쑥 자랐다. 1994년 1만달러 코앞에 다다랐고 이듬해 1만달러 고지를 돌파했다. 서울올림픽 즈음부터 외환위기 직전까지 대략 10년의 기간은 해방 이후 우리 경제가 가장 좋았던 때로 기억된다. 40대 이상 중장년층에겐 잊을 수 없는 '굿 올드 데이즈'(Good Old Days)라 할 만하다.

올해 1인당 GNI가 2만4000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추산됐다. 역대 최고치다. 숫자만 보면 전성기 때보다 곱절은 잘산다. 만세라도 불러야 할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1994년과 비교할 때 삶의 질은 되레 퇴보했다. 서민들의 얼굴 표정도 더 어둡다. 왜 이렇게 됐을까.

고려대 김태일 교수는 "과거보다 잘살기는 해도 삶은 고달프다"고 말한다(김태일 저 '국가는 내 돈을 어떻게 쓰는가'). 무엇보다 고용이 불안하다. 평생고용은 수시명퇴로 대체됐다. 부모들은 사교육비 대느라, 서른 먹은 자식 뒷바라지 하느라 등골이 휜다. 한 집 걸러 하우스푸어 아니면 렌트푸어다. 맞벌이는 하면 하는 대로,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힘들다. 병원비는 또 왜 이리 비싼가. 결정적으로 소득 불평등이 커졌다. 남들은 명품가방 들고 해외 골프여행을 다니는데 내 살림은 나아진 게 없다.

사실 1인당 국민소득은 거품투성이다. 그 기반이 되는 국내총생산(GDP)의 진실은 이렇다. 차 사고로 정비소와 병원이 돈을 벌면 GDP가 올라간다. 바다에서 유조선 기름때를 걷어내도 GDP가 높아진다. 집에서 공부하면 GDP가 제자리지만 밤이슬 맞으며 학원을 순례하면 GDP에 득이 된다. 이렇게 합산한 GDP를 단순 총인구로 나눈 값이 1인당 국민소득이다.

1인당 2만4000달러면 약 2500만원 돈이다. 평균 가구원수를 3.4명으로 잡으면 가구당 연간 8600만원을 번다는 얘기다. 4인 가구는 1억원이다. 이거야말로 뻥이다. 김태일 교수는 가상행렬을 가정한다. 행렬의 맨 앞엔 제일 못사는 사람, 맨 뒤엔 제일 잘사는 사람을 세워 올림픽 주경기장에 1시간 동안 입장시킨다. 평균소득을 버는 사람은 언제 나올까. "30분? 천만의 말씀. 시간이 12분쯤 남았을 때 비로소 평균소득을 올리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 뒤에 대기업 회사원, 회계사, 의사, 변호사, 스타 연예인, 대기업 중역들이 대기하고 있다. 맨 끝엔 재벌 총수다.

같이 어렵던 시절엔 1인당 국민소득이 늘면 온 국민이 기뻐했다. 지금은 부자만 빼고 입이 쑥 나온다.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다. 다른 나라도 사정은 비슷하다. 미래학자 제레미 러프킨은 이처럼 인류의 삶이 고달파진 이유로 석유·석탄·천연가스 등 화석연료의 고갈을 든다. 기름값이 뛰자 물가가 올랐고 물가가 뛰자 구매력이 떨어져 세계적인 경기침체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고상한 설명이지만 딱 피부에 와닿진 않는다.

'응사'에선 삐삐로 사랑을 나눈다. 스마트폰도 없고 소득도 낮지만 삶의 여유가 느껴진다. 그땐 민주화 이후의 정치적 자유도 달콤했다.
시간을 그 시절로 돌리고 싶을 정도다. 과거를 미화하는 노스탤지어 탓일까. 그것만은 아닌 거 같다. 2013년 12월의 한국은 정치든 경제든 너무 팍팍하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