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자수첩

[월드리포트] 현상학적 관점에서 본 북한

윤재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1.03 17:47

수정 2014.10.30 18:15

[월드리포트] 현상학적 관점에서 본 북한

올 한 해 동북아의 최대 변수는 북한이 될 것 같다. 세계는 장성택 숙청 이후 북한의 행동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과연 북한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일체의 편견이나 선입견을 배제하고 현상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북한은 외부 국가들의 우려와는 달리 강력한 지도체제 아래 매우 안정돼 있고 차분해 보인다.

2년 전, 김정일의 뒤를 이어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했을 때 미국과 주변국들은 김정은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미 정부는 그가 정치와 군을 제대로 통솔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졌다. 반면 장성택에 대해선 국제적 수준의 감각을 갖췄고 북한의 체제와 정치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인물로 평가했다.
중국 역시 그를 대화의 채널로 활용해왔다.

주변국들은 마치 장성택이 북한의 주인인 것처럼 여겼다. 그의 위상이 높아지자 일각에선 그가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을 내세워 국가 전복을 기도할 것이란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오너가 아니라 전문경영인에 불과했다. 개혁, 개방 성향의 장성택을 죽게 한 것은 주변국들의 오만함과 정세의 오판에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2011년 김정은이 아버지인 김정일을 수행하며 정치 수업을 받고 있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제는 한 알의 총탄보다 한 톨의 곡식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국경지대를 순방하면서 "중국도 믿을 수 없으니 북방 경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말에는 군사력 못지않게 민생을 중시하겠다는 뜻과 자주 국방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당시 주변국들이 그를 실질적인 북한 권력의 승계자로 용인하고 그를 협상 파트너로 인정했더라면 어땠을까. 김정은의 권력기반이 공고해지고 장성택의 파워는 상대적으로 약화됐을 것이다. 그러면 장성택은 전면에 부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적어도 그가 처형당하는 참사는 빚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김정은의 개혁속도는 빨라졌을 것이며 북한 내부에는 강·온 간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김정은은 친족을 죽이는 패륜을 범했고 피를 본 그는 권력의 비정함을 목도했기에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더욱 잔인해질 수 있다. 주변국들은 그가 더 이상의 죄를 짓지 않고 평화와 공생의 길로 나설 수 있도록 대화의 채널과 활로를 만들어 줘야 한다.

북한을 이해하려면 눈높이와 시간대를 그들에게 맞출 필요가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호처럼 그들의 권력구조와 인민들의 의식구조는 조선을 닮았다. 통치자의 공백이 발생하면 김씨 일족을 중심으로 위정척사론을 내세우며 권력을 장악하려는 세력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날 개연성도 있다. 조선은 이런 식으로 역성혁명 (易姓革命) 없이 500년 이상을 버텼다. 문명 국가에서 한 왕조가 14세기에서 20세기까지 존속해온 것은 조선이 유일하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윤리관은 장기 통치의 기본 이념이었다. 북한의 권력기반이 쉽게 무너질 수 없는 것도 외국인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한민족 특유의 개성과 문화에 기인한다.

북한과는 달리 한국은 국민이 주인이다. 국민들의 의사결정에 따라 대북 전략은 180도 달라지게 된다. 우리의 요구 수준에 맞춰 북한의 정치와 인권 개선만을 강요한다면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신뢰구축을 착실히 추진해 간다면 김정은 정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 정권이 내부적으로 붕괴되고 통일이 앞당겨질 것이란 요행을 기대해선 안된다. 이런 환상에 근거한 대북 정책은 북한의 쇄국을 강화하여 시간만 허비할 뿐 득이 되지 않는다.
이보다는 우리와 생각이 다르지만 대등한 주권국가라는 인식으로 접근하면 의외로 북한의 개방이 앞당겨질 수도 있다. 내정간섭보다는 합리적인 설득이 더 중요하다.


갈등이냐, 아니면 공생이냐는 전적으로 국가의 주인인 국민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kis@fnnews.com 강일선 로스앤젤레스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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