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월드리포트

[fn논단] 사랑과 전쟁

박경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1.06 16:45

수정 2014.10.30 18:00

[fn논단] 사랑과 전쟁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프로이트가 이드·자아·초자아로 구분한 삼분법을 상상계·상징계·실재계라는 삼분법으로 새롭게 재해석하면서 상상계가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에 걸쳐 주로 발생하는 중요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그 시기에 아이는 거울을 바라보면서 자기를 완벽한 주체로 인식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타자(주로 어머니)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으면서도 자기만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라캉은 이를 오인의 단계라 부르고 있다. 이러한 유아적 오인적 단계는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단계라고 하는 단계를 거치면서 바뀌게 되는데 이 변화된 단계를 그는 상징계라고 불렀다.

상징계란 주체가 사회로 진입하면서 사회가 세워놓은 중심 가치를 내면화할 수밖에 없을 때 발생하게 된다. 이제 아이는 자신의 오인단계를 벗어나 사회가 세워놓은 객관화된 가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객관화된 사회적 가치는 어떤 건 해도 되고 어떤 건 해선 안 된다는 금기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데 이 금기를 인정하는 어떤 기준, 혹은 기준의 체계가 말하자면 상징계인 것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징계적 질서를 교란하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상징계에 의해 억압된 무의식적인 상상계적 욕망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현실이 아무리 앞을 가로막는다 해도 거칠 것 없이 달려가게 하는 이 사랑이라는 것, 이것이 이를테면 상상계적 욕망이고 라캉이 말한 오인의 상황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이 사랑이라는 것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아름답다 해서 달려갔던 그 사랑이란 것이 왜 늘 그렇게 파국으로만 끝나게 되는 것일까. 사랑 때문에 탈영해서 감옥살이도 했건만 그 고생을 하고 만난 사람들이 왜 또 그렇게 10년도 채 안돼서 결국은 헤어지고마는 것일까. 모든 것이 리비도가 시킨 오인 때문이다. 세월이 가면 헛것이 가시고 진실이 보이게 마련이니까.

이 오인은 다시 말하면 대상과 나의 관계를 일대일의 관계로 만들게 하는 힘이다. 나와 그녀가, 나와 자식이, 나와 대상이 둘이 아니라 하나가 돼야 한다는 이 나르시시즘적 불안과 강박증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이다. 정치적 독재 또한 사람이, 현실이, 목표가 내가 생각한 대로 돼야 한다는 강박증세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독점적 사랑을 벗어난다고 하는 것, 하나가 아니라 그것이 둘이나 셋도 될 수 있다고 하는 마음의 여유(톨레랑스), 그것이야말로 상상계와 상징계가 적정한 균형 속에 있다는 것이고 달리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소중하게 지켜나가야 할 민주주의적 덕목의 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최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불안한 이유는 수많은 일본 국민이 군국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향해 펼치게 될 그들의 상상적 욕망 때문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잦은 지진과 방사능 누출 등으로 불안과 공포 속에 빠진 그들의 정신적 분열을 하나로 봉합하는 길로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만큼 효과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 이데올로기 속에서 그들은 국가와 일대일의 관계를 형성하고 국가가 설정한 가상의 적을 공격하고 국가를 비판하는 세력이라면 안이나 밖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선명한 이분법의 파시즘적 강박 속에 있게 된다. 이것을 막지 못하면 전쟁이 안 터져도 그 자체가 전쟁이다.
국제사회의 지혜의 결집이 절실한 시점이다.

김진기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