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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중궈, 베이징, 왕징

차상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1.10 17:55

수정 2014.10.30 17:16

[월드리포트] 중궈, 베이징, 왕징

중국의 심장, 베이징에 오면 왕징이란 데가 있다. 한국에서 비행기 타고 90분 정도면 베이징 서우두(首都)공항에 내리는데 택시기사들이 왕징에 가자고 하면 대개 얼굴을 찌푸린다. 너무 가깝기 때문인데 웃돈 주는 게 편하다. 중국말 잘 모르는 한국 사람이 왕징 가자고 하면 기사는 왕푸징에 내려준다. 차비는 두배 정도(2만원) 된다.

'왕'자에 분명히 힘을 주고 말해야 한다.


왕징에 와 본 사람은 알겠지만 동네 풍경이나 사람들 생김새나 한국의 1990년대 소도시 모습이다.

미국 뉴욕,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타운이나 도쿄 신오쿠보도 대단하지만 내가 보기엔 여기는 남다른 곳이다.

왕징은 베이징의 대표적 상업구역인 차오양구의 동북부에 있다.

북송대 과학자 선과(1031~1095)가 쓴 초계필담에 왕징의 명칭이 등장한 것을 볼 때 그 유구한 역사를 알 수 있다.

송나라 때 사학자 오장원이 쓴 천위앤스뤼에(수도소사전)에는 한국을 포함한 동·북지역 각국 사신들이 베이징 입성을 전후해 유숙하고 무역을 하던 땅이라고 적고 있다.

베이징시 중심의 순환도로인 4환로와 5환로 사이 서울 여의도 크기 두 배인 16㎢ 땅에 모두 60만명 정도가 모여 사는데 한국사람은 공식통계로 8만명 정도가 살고 있다. 특별한 주재원이나 유학생 정도 빼고 나면 베이징 거주 한국인은 대부분 여기 산다고 보면 된다. 예부터 외국인들이 몰렸던 동네답게 지금도 외국인이 특히 많다. 여기는 또 10만명 정도의 조선족, 즉 중국동포들이 모여 산다. 중국에서 옌볜지역 빼고 이렇게 조선족들이 밀집한 곳은 없다고 한다.

그보다 더한 것은 자기들 말로 조선사람이라는 북한사람도 200여명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이징 르탄공원 인근 북한대사관 부근을 빼면 전 세계에서 재외 북한사람이 가장 밀집한 곳이다.

베이징에 10개 남짓한 조선식당도 왕징에만 4개나 있다.

다들 장사도 잘된다. 과거에는 한국인 여행객들이나 왕징에 사는 한국사람들이 주된 고객이었지만 요즘은 한류 탓인지 중국사람들끼리도 자주 찾는다.

한국말을 쓰는 3개의 전혀 다른 체제 속 사람들과 중산층 중국인이 오순도순 모여 사는 곳이 왕징이다.

여기서 한국인들이 주로 사는 아파트 단지는 집값(월세)이 엄청나게 비싸다.

동네는 5환인데 3환이내 베이징 중심지역보다 더 비싸다.

왕징은 중국의 한류가 꽃을 피우는 곳이다.

특파원으로 왕징에 들어와 처음 간 식당이 자하문이란 한식당이다. 손님은 2012년까지도 한국사람이 다수였지만 지금은 점심 때든 저녁 때든 홀에서는 한국말 듣기 힘들 정도가 됐다.

요즘은 왕징의 조그만 한국식 통닭집부터 삼겹살구이집까지, 심지어 순두부나 곱창전골집까지 중국사람들로 넘쳐난다.

입소문이든 인터넷 소식을 통해서든 다양한 경로로 정보를 얻은 중국사람, 특히 젊은 친구들이 한국음식을 맛보러 왕징을 찾는다.

왕징에 한국인이 모여든 것은 동아시아 외환위기 직후 1998년 전후다. 이후 2000년대 들어 차오양구 정부가 왕징을 본격 개발하면서 기업 주재원이나 유학생 등이 모여들면서 한인타운이 형성됐다.

한류의 중국 중심지이자 한국 산업의 중국 진출 통로이고 한국말을 쓰는 한민족들이 유별나게 모여사는 동네인 만큼 중국을 찾는 한국의 대통령도 한번쯤은 와볼만 한 곳이다.

그런데 음식점 말고는 한국 특색을 가진 가볼만 한 곳이 없다.

한류는 바람인데 그 바람이 불고나면 베이징의 한국문화도 흔적없이 사라져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왕징 특파원 생활도 이제 3주쯤 남았다.

그리울 것이다.
왕~징.

다시 찾았을 때는 과거 신라방 수준을 넘어 3개 체제의 문화를 보듬은 한국적 명소가 있었으면 좋겠다.

csky@fnnews.com 차상근 베이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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