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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누가 ‘영리화 반대’한다고?

이재훈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1.16 16:48

수정 2014.10.30 15:04

[이재훈 칼럼] 누가 ‘영리화 반대’한다고?

"대한의사협회는 2012년 당연지정제가 획일진료를 강요한다며 이를 폐지해야 한다고 헌법소원을 냈는데, 이거야말로 의료민영화 아닌가?"(이창준 보건복지부 과장)

"모든 의료인이 정부와 계약을 하는데 이 계약이 불공정하고 불합리하다. 이 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계약을 깰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계약을 깨는 게 목적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노환규 대한의사협회장)

지난 14일 민주당 의원 주최로 열린 '박근혜정부 의료영리화 정책 진단 토론회'에서 정부 측과 의사 측이 공방을 벌인 내용이다. 얼핏 선문답 같은 이 두 마디 말에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의(醫)·정(政) 갈등의 실체가 숨어 있다. 정부가 투자 활성화 차원에서 추진한 원격진료 허용과 의료법인 자회사 설립에 의협은 극구 반대하며 집단휴진(파업)까지 결의했다.
의사들은 '의료민영화 반대'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이게 잘 먹히지 않으니 얼마 전부터는 구호를 바꿔 '의료영리화 반대'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민영화 반대'건 '영리화 반대'건 의사들이 주장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지금까지 누구보다 앞장서서 의료 민영화·영리화를 요구했던 세력이 바로 의사와 의협이었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의료수가와 의료기관 당연지정제를 토대로 한 건강보험 시스템을 '의료 사회주의'라고 비판해왔다. 당연지정제란 우리나라 모든 병원이 건강보험 가입자에 대한 진료비를 건강보험공단에 청구하도록 한 제도다. 전 국민이 건강보험에 가입한 상황에서 환자에 대한 진료비를 정해진 수가대로만 청구할 수 있는 것이다. 국내 의료기관의 94%가 민간 소유다. 그런데도 우리 의료체계를 '민영화'가 아닌 '공영화'라고 하는 이유는 이 같은 건강보험 시스템 때문이다. 따라서 의료를 민영화 또는 영리화하려면 기존 건강보험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의협이 2002년과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당연지정제 폐지에 대한 헌법소원을 낸 것도 이 때문이다. 당연지정제가 폐지되면 병원들이 의료수가를 임의로 정할 수 있는 길이 열려 '돈 되는 환자'를 받을 수 있다. 그런 의사들이 이제 와서 민영화·영리화를 반대한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정부가 당연지정제를 폐지하지도, 건강보험 시스템을 바꾸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따라서 의료 민영화나 영리화가 없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의사들이 잘 안다. 정부측 질문에 대한 의협 회장의 답변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말한 '계약'이란 의료수가다.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의료수가를 개선하기 위해 당연지정제 폐지를 빌미로 내세웠다는 해명이다. 의협의 진짜 목적은 대폭적인 의료수가 인상임을 드러낸 것이다.

원격진료와 병원 자회사 설립은 시대 상황을 반영한 규제 완화일 뿐 의료 민영화·영리화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를 두고 "의료 영리화의 전초 단계"라고 하는 건 마치 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이 철도 민영화를 의미한다는 주장처럼 논리적인 비약이다. 게다가 병원협의체인 대한병원협회는 이 같은 조치가 "병원 경영난 개선을 위한 것이며 국가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환영했다. 의료계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의료파업은 추진동력의 상당부분을 잃은 듯하다.

의·정은 17일부터 협상을 시작한다. 일단 정부도 의료법 개정안의 국무회의 상정을 보류했다. 의료수가 인상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정부도 현재의 의료수가가 너무 박하다는 데 어느 정도 동의했다. 하지만 의협이 원하는 만큼 대폭적인 인상이 이뤄질지는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의사들이 총파업의 '유혹'을 다시 느낄 수도 있다. 실제로 지난달 열린 의사궐기대회에서 "2000년에 마무리하지 못한 투쟁을 이제 마무리하자"는 구호가 나왔다.

2000년 의약분업 시행을 계기로 의사들이 다섯 차례에 걸쳐 집단휴진을 하는 등 사상 초유의 의료대란이 일어났다.
의사들은 결국 국민의 건강을 볼모로 처방료 대폭 인상, 전공의 처우개선 등을 관철하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국민은 우리 사회의 엘리트층이라는 의사의 양심도, 히포크라테스 선서도 더 이상 믿지 않게 됐다.
얻은 것보다 잃은 게 훨씬 많았다는 사실을 의사들은 아는지 모르겠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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