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마이클 마코토 혼다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1.23 17:00

수정 2014.10.30 04:27

[곽인찬 칼럼] 마이클 마코토 혼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여섯대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일본군 전폭기 수백대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했다. 미 해군 전함들은 싸워보기도 전에 침몰했다. 항공기는 188대가 파괴됐다. 병사 2400명이 죽고 1200여명이 부상했다. 일본 쪽 피해는 경미했다. 비행기는 29대 격추됐고 사상자는 65명에 불과했다.


이듬해 2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캘리포니아 등 미국 서부에 살던 일본계 미국인을 강제수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로지 일본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11만2000명이 콜로라도주 남동쪽의 그라나다 수용소 등 10곳에 강제로 끌려갔다. 이들은 적국 일본을 돕는 잠재적 간첩으로 간주됐다. 수용소엔 달랑 가방 하나만 가져갈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라나다 수용소엔 7300명가량이 갇혔다.

그라나다 캠프엔 한 살짜리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는 다섯 살까지 수용소에서 살았다. 훗날 아이는 "우리가 탄 차는 창문이 닫혔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끌려갔다"고 회고했다. 전쟁이 끝나고 1946년이 되어서야 그는 수용소에서 나와 캘리포니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귀가하는 이들에겐 25달러와 기차표 한 장이 주어졌다. 수용소에서 보낸 5년은 그의 인생 항로를 결정했다. 나중에 커서 그는 소수자 권리보호에 온 힘을 쏟는다. 그의 이름은 마이클 마코토 혼다다. 줄여서 마이크 혼다라고 부른다.

수용소로 끌려간 11만2000명 중 3분의 2는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권자다. 강제수용을 놓고 위헌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미 대법원은 1944년 합헌 판결을 내렸다. 일본계 미국인들이 명예를 회복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1980년 강제수용의 적법성을 조사할 특별위원회가 설치됐다. 8년 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정부를 대신해서 강제수용에 사과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법안은 당시 정부의 결정이 "인종편견과 전쟁 히스테리에 기초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혼다는 2000년 캘리포니아주에서 민주당 후보로 연방 하원에 진출했다. 2001년 9·11 테러가 터졌다. 중동에서 암약하는 알카에다라는 테러 조직이 주범으로 찍혔다. 미국에 살던 무슬림들은 전전긍긍했다. 모든 무슬림이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간주됐다. 머리에 히잡을 두르고 외출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이때 혼다가 나섰다. 그는 전미무슬림동맹(AMA) 총회 연설에서 무슬림들에게 이름이나 정체성을 바꾸지 말라며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2006년 미네소타주 출신의 하원의원 키스 엘리슨이 성경 대신 코란 위에 손을 얹고 의원 선서를 하겠다고 해 논란이 일었다. 엘리슨은 하원에 진출한 첫 무슬림이었다. 보수파가 이를 문제삼았다. 이때도 혼다는 엘리슨 편에 섰다. 혼다는 종교나 인종을 잣대로 편을 가르는 다수의 횡포를 경계했다. 결국 엘리슨은 코란 위에 손을 얹고 선서했다.

그런 혼다가 2007년 7월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주도한 것은 당연했다. 지난 7년간 일본 정부는 결의안을 애써 모른 척했다. 그러자 연초 혼다는 새해 세출법안에 슬쩍 위안부 관련 법안을 끼워넣는 기지를 발휘했다. "국무장관은 2007년 통과된 위안부 결의안을 일본 정부가 준수하도록 독려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보수 우경화로 치닫는 아베 신조 총리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일본계 혼다에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혼다(72)는 7선(하원은 2년마다 선거)의 중진의원이다. 하지만 오는 11월 선거에선 만만찮은 당내 경쟁자를 만났다. 30대의 인도계 라이벌은 풍부한 자금으로 무장했다. 혼다를 싫어하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자금줄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한국계 미국인들이 '혼다 구하기'에 나섰다. 잘하는 일이다.
태평양 건너 한국에서도 진심어린 응원을 보낸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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