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한국판 러다이트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2.10 16:24

수정 2014.10.29 20:54

[곽인찬 칼럼] 한국판 러다이트

왜 하필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을까. 왜 프랑스나 스페인이 아니고 영국인가. 학자들은 그 뿌리를 명예혁명(1688년)에서 찾는다. 명예혁명의 승자는 의회와 국민, 패자는 왕이다. 의회는 왕의 전제(專制)를 견제했다. 사유재산권, 특허권이 확립됐고 자의적 과세도 중단됐다. 입헌군주국의 면모가 이때 갖춰졌다.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인센티브에 반응했다.

혁신가와 상인은 큰돈을 만졌다. "명예혁명에 이어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대런 애스모글루.제임스 로빈슨 공저).

그렇다고 18세기 중엽의 산업혁명이 거저 온 것은 아니다. 혁신은 조지프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를 수반한다. 파괴는 기득권자들의 저항을 부른다. 기계에 밀려 일자리를 잃은 수공업 장인(匠人)들을 러다이트(Luddite)라고 불렀다. 저항은 격렬했다. 집단으로 폭동을 일으키고 기계를 파괴했다. 그러나 러다이트 운동은 산업혁명이라는 도도한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다.

프랑스 등 서유럽도 늦었지만 혁신의 물결에 올라탔다. 동유럽과 러시아는 그렇지 못했다. 아시아에선 일본이 가장 민첩하게 움직였다. 중국은 굼떴다. 조선은 척화비를 세웠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멀리는 로마제국의 몰락을 혁신 결핍증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에 한 남자가 깨지지 않는 유리를 발명했다. 들뜬 사내는 황제에게 발명품을 보여주었다. 황제는 "다른 이에게 보여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하자 황제는 사내를 끌어내 죽이라고 명령했다. 깨지지 않는 유리 때문에 황금의 가치가 추락할까 두려워한 탓이다.

국가 간 불평등은 어디서 오는 걸까. 18세기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몽테스키외는 열대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게으르다고 말했다. 지리결정론은 지금도 꽤 먹힌다. 그러나 통일 이전의 동서독과 지금의 남북한을 보라. 지리.기후가 국부를 결정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문화·종교에서 원인을 찾는 것도 부질없다. 한때 유교는 아시아 낙후성의 주범으로 지목됐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 등 네 마리 용과 중국의 급성장을 설명하는 데 쓰인다.

국부는 제도가 결정한다. 혁신과 인센티브를 허용하는 포용적 정치.경제제도를 갖추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세계 최강 미국에선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래리 페이지, 마크 저커버그 같은 인물이 줄줄이 탄생한다. 그 대척점에 옛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 남미.아프리카의 독재국가들이 있다.

한국은 어디쯤 있을까. 2000년대 이전 제조업 시대엔 혁신과 인센티브가 충만했다. 한강의 기적도 거기서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서비스산업 시대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제조업 시대의 두툼한 외투를 걸치고 있다. 압축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한국의 정치.경제제도는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현 제도가 서비스산업 시대에도 적합한지는 의문이다.

제조업은 생산성이 너무 높아서 탈이다. 웬만한 일은 기계가 알아서 척척 한다. 이제 일자리는 서비스산업에서 나온다. 정부도 이를 모르지 않는다. 박근혜정부는 보건.의료, 교육, 관광, 금융, 소프트웨어를 5대 유망 서비스산업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진척은 더디다. 기득권층의 저항이 거세기 때문이다. 한국은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이지만 의사들은 원격진료에 반대하고 있다. 관광산업을 키우자고 하면 카지노가 웬말이냐며 발끈한다. 관치의 그늘에 갇힌 금융은 국제무대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서비스산업 혁신에 맞선 기득권층의 저항은 한국판 러다이트 운동을 보는 것 같다. 변화를 거부하는 사회는 정체하거나 퇴보한다.

애스모글루와 로빈슨은 "기술 혁신의 물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가난에 시달릴 것인지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달성할지 엇갈린 운명을 걷게 된다"고 말한다. 한국은 제조업에서 삼성전자.현대차를 배출했다.
이제 서비스산업에서 제2의 신화에 도전할 때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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