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자수첩

[월드리포트] 실종된 ‘노블레스 오블리주’

윤재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3.07 17:44

수정 2014.10.29 05:53

[월드리포트] 실종된 ‘노블레스 오블리주’

오늘날 금융자본주의는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규정한 천민자본주의 형태로 퇴행해 가는 양상이다. 배금사상과 이기주의가 만연하면서 인간성이 메말라가고 있다. 청교도를 건국 이념으로 하는 미국은 석유재벌인 존 D 록펠러 이후 자선과 기부 문화가 사회적 풍토로 정착했으나 베이비붐 세대가 전면에 부상한 이후 기업윤리가 퇴색하고 탐욕이 지배하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가 일천한 한국은 거의 혼돈 상태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감옥을 별장 드나들 듯하고 '돈이 전부'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라곤 찾아 보기 어렵다.
이제 선진국 반열에 올랐으니 선인들이 남긴 고귀한 정신과 가르침을 되새겨 국격에 걸맞은 가치관과 인생 철학을 정립해 나갈 때가 왔다고 본다.

주역에 '적선지가 필유여경, 적불선지가 필유여앙(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이란 말이 있다. 선을 쌓은 집안엔 반드시 경사가 있고 선이 아닌 것을 행하면 재앙이 온다는 뜻이다. 이는 예언적 의미를 담고 있다. 덕을 베풀면 복이 후손들에게 미친다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 집안의 얘기는 이 경구(警句)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그의 가족사는 10대조 김연(金堧 )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종 때 현감을 지낸 그는 말직에다 신라 왕족의 후손이라는 것을 빼놓곤 내세울 게 별로 없었다. 그는 왕명을 받고 임꺽정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평안도 안주 목사가 됐다. 양민 학살에 염증을 느껴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고향인 경북 안동으로 가지 않고 충남 서산에 새 터전을 마련했다.

김연의 손자 김적(金積)은 땅을 개간해 거부가 됐다. 임진왜란 동안 3000석(6000가마)이 넘는 곡식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주어 그 마을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없었다. 사료(史料)엔 그가 "관대하고 대인의 풍모를 지녔으며 부자임에도 재물에 욕심이 없는 인물"이라고 기록돼 있다. 광해군 시절 벼슬길에 올랐으나 왕의 폭정에 실망해 곧 낙향했다.

그의 후덕함 때문인지 그 집안은 대대로 광영을 맞았다. 그에게서 왕비와 부마, 네 명의 정승이 나왔고 판서(장관), 한성부판윤 (서울시장), 관찰사(도지사) 등 중앙과 지방의 수장이 십수명에 이르러 그 가문은 조선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아들인 황해 관찰사 홍욱은 효자로 유명했다. 그는 늘 홀아버지 걱정뿐이었다. 맏형은 병자호란 때 인조를 지키기 위해 근왕병을 이끌고 가다 전사했고, 다른 아들은 일찍 죽어 아버지를 봉양할 형제가 없었다. 효종은 극진한 효심에 감복하여 집을 하사했다. 훗날 바로 그 집에서 영조대왕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태어났다. 왕후는 가난한 선비 가정에서 궁핍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효성과 형제애가 남달라 만인의 귀감이 되었다.

홍욱의 증손 유경은 부친의 시묘(3년간 부모의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사는 것)를 위해 영조가 제수한 평안감사직도 마다할 만큼 효성이 지극했다. 단원 김홍도의 '평안감사향연도'에 나오듯 그 자리는 명예와 부, 풍류를 상징하는 요직이었으나 그는 미련을 두지 않았다.

다른 증손인 흥경은 청렴하고 검소했다. 영의정에 오른 그는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국록 외엔 부를 축재하지 않았다. 백성을 무척 아꼈던 성군 영조대왕은 그런 성품을 가진 그와 겹사돈을 맺었다. 조선왕조실록은 그가 "명성이 혁혁하지는 않았으나 근검했다"고 적고 있다. 아들이 부마였지만 그 사실을 아는 이가 거의 없을 만큼 자중했다. 그의 재종질녀(7촌 여조카)가 정순왕후다.

둘째 아들 한신은 대왕이 유난히 예뻐했던 화순옹주와 결혼했다. 그는 효장세자의 친동생이자 사도세자의 이복 누나였다. 부부는 신분에 걸맞지 않게 방 두 칸짜리 작은 집에서 지냈으나 후일 대왕의 명에 의해 통의동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실록에 의하면 그는 의관이 수수하고 초거가 아닌 말을 타고 다녀 부마로 아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옹주도 호사함을 경계하고 검약하며 지냈다. 그는 남편이 죽자 곡기를 끊고 순절하여 왕족 가운데 유일하게 열녀문을 하사받았다.


한신은 후사가 없어 맏형의 장자를 입양하여 가문의 대를 잇게 되니 추사는 그의 증손이자 영조대왕의 외고손이었다.

kis@fnnews.com 강일선 로스앤젤레스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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