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자수첩

[월드리포트] 세월호를 잊어선 안 되는 이유

윤재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5.02 16:53

수정 2014.10.28 01:40

[월드리포트] 세월호를 잊어선 안 되는 이유

"발달(發達)하지도 아니하고 발전(發展)하지도 아니하고 이것은 분노(憤怒)이다."

이상의 시, '이상한 가역반응'의 한 구절이다. 당시엔 사형선고나 다름없던 폐결핵에 걸린 자신을 치료할 의술이 발달하지 못한 데 대한 원망과 울분을 천재 시인은 그렇게 토로했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 강국이라지만 작금의 사태를 보면 말문이 막힐 뿐이다. 유인우주선이 화성에 가는 시대가 눈앞에 다가왔지만 침몰선의 승객들을 구할 기술은 없었다. 세월호는 세상과 단절되고 어른들의 무분별한 돈벌이에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다.
울화와 슬픔을 넘어 허탈하다.

이번 참사는 한국 사회에 내재해 있는 구조적 병폐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세계에서 유례없이 빠르게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변신했지만 정신은 물질의 성장 속도에 반비례하여 퇴행해왔다.

총체적인 부정부패와 반인륜적인 기업인들의 과도한 물욕이 참극의 요체다. 세월호가 아니어도 유사한 비극은 시간이 문제일 뿐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무력한 승무원들만 단죄하고 지나가기엔 너무나도 버겁다. 그들을 살해한 것은 인명경시와 부조리가 판치는 세상과 파렴치한 관행들로 점철된 흘러간 세월 속의 시간들이다.

외신들은 처음엔 선원들만 탓했으나 진상이 드러나면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분위기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인들이 윤리적, 영적으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전한 메시지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위기대처능력은 정부가 보완해야 할 시급한 과제다. 외부에 비친 한국은 실망, 그 자체였다. 천재지변과 대형사고는 언제든 일어난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피해를 극소화하고 위기를 극복하느냐가 국가의 성숙도와 위상을 결정짓는 잣대가 된다.

위험 요소는 도처에 산재해 있다. 20여년 전 수많은 아파트들이 바닷모래로 지어졌다. 염분으로 인해 철근이 성할 리 없을 테고 언제든 붕괴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고층건물들은 내진 설계가 제대로 됐는지 재점검해야 한다.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의 고사를 보면 서해 지역은 예로부터 지진이 빈발했다. 한때 해저 지진으로 아산만 일대에 대형 쓰나미가 일어나 상전벽해가 됐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한반도는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다.

백두산 화산은 한반도에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 북한의 낙후된 원자로와 고장이 잦은 남한의 원자력발전소는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다.

국가는 예상 가능한 재앙들에 대비해 늘 비상체제를 구축해 놓고 있어야 한다.

미국은 재난이 발생하면 각 방면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연방재난관리청(FEMA)의 주도하에 일사불란하게 사태를 수습한다. 국민은 최고의 베테랑인 그들을 신뢰하고 결과에 순응한다. FEMA는 기우나 다름없는 소행성이나 유성들과의 충돌 가능성에도 대비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엔 그런 시스템이 없다. 세월호는 한국의 미니어처를 보는 듯하다. 만일 북한군이 기습 침투하여 수도권 일부 지역을 점령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어찌될까. 나라는 순식간에 통제기능을 상실하고 세월호꼴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지도층 인사들은 피신하기 바쁘고 대다수 국민들만 희생당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는지. 또 일본이 독도를 무단 점거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물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나 FEMA가 감시하고 있는 지구와 소행성이 충돌할 확률보다는 훨씬 높다.

재앙이 닥치면 피해자 가족은 감성적으로 변하고 판단능력을 상실하게 마련이다. 그때 이들을 보듬고 지켜줘야 하는 게 국가다. 미국인들에겐 지구 어디에 있든 국가가 곁에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미국인의 애국심은 각별하다.

아이들을 비롯한 무고한 승객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려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온 나라가 정신적으로 재무장해야 할 것이다. 먼저 미 FEMA와 같은 강력한 조직을 갖춰 재난에 대비해야 한다.
또한 국민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재난을 전담할 청사 앞에 위령탑을 건립하고, 그 옆에는 고 박지영양 등 의인들의 군상(群像)을 세워 현세와 후세의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세월호 희생자들이 남기고 간 무언의 유훈을 잊어선 안 된다.
그들은 육신을 바쳐 미래에 닥칠 국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일깨워 주고 떠난 숭고한 전령(傳令)들이었기 때문이다.

kis@fnnews.com 강일선 로스앤젤레스 특파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