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국가를 개조한다고?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5.12 16:51

수정 2014.10.27 23:47

[곽인찬 칼럼] 국가를 개조한다고?

영화 '역린'을 봤다. 조선 22대 임금 정조의 암살을 그린 작품이다. 내가 영화를 판단하는 기준은 단순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시계를 들여다보게 되면 그저 그런 영화다. '역린'은 2시간15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몰랐다.

'역린'은 사실(史實)과 허구가 뒤섞였다.
정조에 대한 암살 시도는 역사적 사실이다. 영조 사후 왕세손 정조(재위 1776~1800년)의 즉위는 노론(老論)에 충격이었다. 정조는 취임 일성으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노론은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이는 데 앞장섰다. 그 아들이 왕이 됐으니 눈앞이 캄캄할 수밖에.

노론이 정조를 죽이려는 시도는 세 차례 있었다. 처음엔 왕의 침소인 존현각(尊賢閣)으로 자객을 보낸다. 영화는 바로 이 사건을 다룬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말한다. "대궐의 최고 웃어른인 대비 정순왕후부터 국왕의 호위군관과 내시, 상궁, 궁녀, 청소부까지 가담했으니 실패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조선왕을 말하다 2').

하지만 거사는 실패한다. 깊은 밤 자객 둘이 존현각 지붕에 몸을 숨겼다. 정조가 잠들면 지붕을 뚫고 내려가 살해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어릴 적부터 올빼미 체질이었다. 세손 시절에도 암살당할까 두려워 옷을 벗지 못하고 자는 때가 많았다. 그날도 정조는 늦은 밤까지 책을 읽다 지붕에서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소리를 지르자 호위병들이 달려왔다. 자객들은 부리나케 도주했다.

영화에선 자객이 무더기로 나온다. 도승지 겸 금위대장 홍국영이 이끄는 경호실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총·칼·화살이 오가는 요란한 싸움 속에 정조도 신궁 솜씨를 발휘한다. 자객 두목과 정조가 결판을 벌이는 순간, 여기까지만 말하자. 더 나가면 스포일러다.

암살 2라운드. 이번엔 무녀 차례다. 영검한 무녀가 붉은 안료 주사(朱砂)로 정조와 홍국영의 얼굴을 그린다. 그러곤 화살에 두 얼굴을 얽어맨 뒤 허공에 쏘면서 둘은 반드시 죽는다고 저주했다.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200여년 전엔 제법 그럴 듯한 암살시도였다. 무녀의 신통력이 신통찮았던지 정조와 홍국영은 멀쩡히 살아남았다.

암살 3라운드. 초조해진 노론은 궁의 계집종까지 동원했다. 종을 시켜 한밤중에 왕의 침실에 들어가 살해하려 했다. 이 음모엔 내시, 호위군관, 나인도 연루됐다. 노론은 정조를 시해한 뒤 왕의 이복동생 은전군을 권좌에 앉힌다는 시나리오까지 짰다. 이덕일은 "이런 상황에서 정조가 암살을 모면한 것 자체가 천운"이라고 평했다.

정조는 조선의 대표적인 개혁군주로 꼽힌다. 그는 노론 일당독재를 무너뜨리려 했다. 정약용 등 남인을 등용하고 이덕무·박제가 등 서자를 중히 썼다. 상공업 중심의 실용 개혁론을 주창한 북학파가 여기서 나왔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저항은 집요했다. 정조가 죽자마자 역사는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노론에 의해 정조 치세 24년은 물거품이 된다. 그로부터 약 70년 뒤 일본은 메이지유신(1867년)으로 나라를 뜯어고친다. 이토 히로부미 등 시대에 눈뜬 사무라이들이 개혁·개방을 이끌었다. 조선엔 정조의 개혁을 뒷받침할 세력이 미약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국가개조에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정조의 예에서 보듯 국가개조는 지난한 작업이다. 24년 개조 노력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게 정치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정책은 5년마다 롤러코스터를 탄다. 단임제 권력구조 아래에서 '원샷' 국가개조는 욕심이다.

이미 벌여놓은 판도 많다. 경제혁신, 공기업 개혁, 규제혁파는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여기에 안전, 관피아(관료+마피아) 타도 숙제까지 얹어졌다. 박 대통령의 임기는 3년가량 남았다. 주어진 시간과 역량에 비해 전선(戰線)이 너무 넓다. '역린'에서 정조는 말한다.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면 세상은 바뀐다.
" 중용 23장에 나오는 말이다. 다 잘하려는 생각 버리고 하나라도 끝장을 보는 게 낫다.
하나하나 쌓이면 그게 국가개조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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