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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글로벌 경제 위협하는 低물가의 비밀

윤재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6.27 17:30

수정 2014.06.27 17:30

[월드리포트] 글로벌 경제 위협하는 低물가의 비밀

물가는 많이 올라도 탈이고 오르지 않아도 문제다. 지난 2007년 이후 미국, 유럽을 비롯한 글로벌 경제는 일시적으로 물가상승(인플레이션)에 시달렸으나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심각한 물가하락(디플레이션) 늪에 빠져 들었다.

인플레가 심해지면 돈가치는 하락하고 가계 부담은 가중된다. 하지만 물가가 떨어지는 디플레는 인플레보다 더 위험할 때가 많다. 소비가 둔화되면 기업들은 판매를 늘리려고 가격을 내린다. 기업의 이윤은 줄고 생산은 위축되며 실업이 증가한다.
경기는 전보다 더 나빠지고 가계 소득과 부동산, 주식 등 자산가치가 급락하면서 소비가 둔화된다.

이런 악순환이 빨라지면 종국에 가선 공황이 찾아온다. 1929년 '대공황 '과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수년간 지속됐던 '대침체'도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지금은 어떤 상태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단 위험한 고비는 지났고 회복을 기다리는 중이다. 다만 후유증은 지속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와 유럽중앙은행(ECB) 등 세계 주요 중앙은행들은 천문학적인 유동성을 공급했으나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가치만 올랐을 뿐 물가는 제자리 걸음이다. 그래서 현재의 저물가를 '수수께끼 (Conundrum)'라고 부른다.

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의 정책 결정에 기초가 되는 개인소비지출물가지수(PCEPI)는 지난 4월 현재 1.6%에 그쳐 24개월 연속 연준이 설정한 목표치 2%에 못미쳤다. FOMC는 2%선을 단기금리의 인상 기준점으로 설정해 놓고 있다.

여러 경제 지표나 현상만 놓고 보면 현재의 경제여건을 디플레이션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디플레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현재의 저(低)물가는 근본적으로 소득의 불균형에서 파생하고 있다.

중앙은행들이 공급한 막대한 유동성은 대부분 가계와 개인보다는 기업으로 유입됐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현금을 갖고 있는 기업들은 고용이나 투자를 늘리는 대신, 주식이나 부동산 등 자산에 대한 포트폴리오를 확대함으로써 경제의 이중 구조를 심화시키고 있다. 즉 기업과 상류층에서는 인플레가, 중·하류층에서는 디플레가 지배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FOMC는 최적의 통화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단순한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아닌 PCEPI를 표준으로 채택하고 있으나 이 역시 얼마나 정확하게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고(高) 실업률과 고용시장의 질적 저하도 저물가를 가중시키고 있다.

미니애폴리스 연방은행의 자료를 보면 미국의 실업률은 지난 2007년 3월엔 4.4%였다가 그해 말엔 5%로 약간 올랐다. 그후 경기침체의 여파로 2009년 10월엔 10%를 넘어섰고 현재는 6.3%로 떨어졌다.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실업률은 하락했어도 고용의 질은 오히려 악화됐다. 정규직은 줄고 임시직과 시간제 일자리만 늘었다. 6개월 이상의 장기 실업자와 구직을 포기한 사람이 많아 정확한 실업률도 측정하기 어렵다. 고용시장의 불안은 소비둔화로 이어져 물가를 낮추는 원인이 되고 있다.

개인과 가계의 부채상환(디레버리징·deleveraging)도 저물가를 유발하는 요인이다. 금융기관과 대기업들은 정부의 대규모 지원으로 회생에 성공했고 부채도 대부분 상환했다. 지금은 개인과 가계의 디레버리징이 한창 진행 중이다.

2007년엔 개인소득 대비 부채가 110%에 근접했으나 지난해 80%선까지 떨어졌다. 이는 균형 부채와 대략 일치하는 점이어서 개인의 디레버리징이 거의 막바지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개인과 가계는 금융기관들로부터 대출받기 어려운 만큼 디레버리징은 소비 둔화로 직결된다.

이것은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선진 각국이 겪고 있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저물가는 상대적으로 빈곤해진 대다수 국민들에겐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 이면엔 일자리를 잃거나 힘겹게 빚을 갚아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뼈를 깎는 고통과 희생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kis@fnnews.com 강일선 로스앤젤레스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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