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칼럼] 사내유보금 과세의 경우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07.21 16:51

수정 2014.10.25 00:44

[곽인찬칼럼] 사내유보금 과세의 경우

노란 숲 속에 두 갈래로 길이 나 있었습니다…/먼 훗날 나는 어디에선가/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그리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노라고/그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주 "새 경제팀은 지도에 없는 길을 걸어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취임 후 처음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다. 지도에도 없는 길이라는 말에서 프로스트보다 더 단호한 부총리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지도에 없는 길 1호로 내놓은 게 사내유보금 과세다. 재계는 반발했다. 뒤통수를 맞은 느낌일 게다.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지낸 최경환 의원이 박근혜정부 2기 경제팀장으로 내정됐을 때 재계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친박 실세에 거는 기대가 컸다. 재계의 숙원을 풀 초대형 규제완화를 기대했건만 대뜸 사내유보금 과세라니, 이게 뭐람.

최 부총리는 돈 많이 버는 기업에 두 갈래 길을 제시했다. 사내유보금을 쌓아 두고 세금을 내든가 아니면 배당이나 임금으로 나눠주든가. 방점은 배당·임금에 찍혀 있다. 최 부총리의 사내유보금 정책은 범지구적인 차원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소득 불균형은 국제 이슈로 떠올랐다. 전후 시장경제의 수호자 역할을 해온 국제통화기금(IMF)마저 "각국의 소득 불평등이 경제성장을 방해한다"고 경고할 정도다. 지난 2월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소득 격차로 인한 '배제의 경제(Economy of Exclusion)'가 사회 결속을 해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소득 불평등이 사회불안을 부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지난 6월 IMF는 공개적으로 미국에 최저임금 인상을 촉구했다. 최대주주인 미국을 향해 IMF가 대놓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이례적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겐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오바마 대통령은 근로자 최저임금을 시간당 7.25달러에서 10.10달러로 올리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하지만 의회 내 공화당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독일은 이달 초 법정 최저임금제를 도입했다. 연방하원은 시간당 8.5유로(약 1만1800원)의 최저임금제 법안을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여태껏 독일은 최저임금을 보장하는 법이 없었다. 대신 임금은 노사 자율에 맡겼다. 이번 조치로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약 530만명의 독일 노동자들이 혜택을 입게 됐다.

슈퍼 친기업 정책을 펴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임금만큼은 기업들의 양보를 채근해 왔다. 올봄 아베 총리는 일본 최대 노동조합 렌고(連合)가 주최한 노동절 행사에 참석했다. 여기서 아베는 "기업 수익이 임금으로 이어지는 게 중요하다. 여러분이 경기 회복을 실감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실제 아베는 기업들을 찾아다니며 임금 인상을 독려했다. 아베노믹스와 엔저 덕에 수익이 커진 도요타·닛산·혼다·히타치·파나소닉 등은 총리의 요구를 외면하지 못했다.

우리도 최근 내년 최저임금을 올해보다 7.1% 오른 시간당 5580원으로 정했다. 재계의 반발이 있었지만 "최저임금을 결정할 때 소득분배 조정분을 감안하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 관철됐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되레 일자리가 줄어 서민에게 피해가 돌아간다는 주장은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격이다.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지나친 빈부격차는 민주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의식을 약화시킨다"고 지적한다('정의란 무엇인가'). 최 부총리의 사내유보금 과세 정책은 공동선의 맥락에서 봐야 한다. 한국은 시나브로 세계에서 가장 빈부 격차가 큰 사회가 됐다. 기업은 부자인데 가계는 가난하다. 소득 불평등은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궁극적으로 시장경제 체제를 위협한다.
한 나라의 경제 수장이 이 같은 현실을 외면한다면 직무유기다. 최 부총리는 지도에도 없는 길을 가겠다고 천명했다.
기업들도 지도 밖 길을 가야 할지 모른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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