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학에 듣는다]

통화는 어떻게 창출되나

유럽중앙은행(ECB)은 지난 6월 영국은행(BOE)의 2012년 선례를 따라 '실물경제를 위한 은행 신용(BCRE)'을 새로운 정책 목표로 규정했다. 수주일 뒤 BOE는 부동산 거래를 위한 신용 규모를 제한하는 지침을 도입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전 같았으면 이는 모두 공인되지 않은 금융시장 간섭이라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2005년 차드 워너는 '은행위기 재발' 방지를 위해 이런 정책을 권고했다가 격렬한 비판에 직면했다.

그러나 올 3월 BOE는 워너 등의 권고를 수용했고, 신용 확대를 통해 통화공급을 실제로 97% 확대할 수 있었다. 은행 신규대출 1달러로 통화공급을 1달러 늘릴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은행들은 금융중개기관이 아니라 통화 창조자가 되는 셈이다.

은행의 진정한 기능에 대한 점증하는 인식은 통화정책과 금융 규제 같은 분야에서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고 정책 담당자들이 은행위기 재발, 실업, 저성장 같은 문제들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것도 가능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수용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전통적인 경제학의 근간에 배치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이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르면 저축은 유용하기는 하지만 투자와 경제 성장에 필수 전제조건이 아니다. 저축 없이 오랜 성장을 지속했던 미국이 좋은 예다.

보편적으로 경제성장은 거래 증가와 이에 소요되는 통화 증가에 좌우된다. 은행들은 신용확대를 통해 자금을 공급하고 누가 자금을 받느냐에 따라 그 영향이 달라진다. 국내총생산(GDP) 거래에 투입된 은행신용은 명목 GDP에 영향을 주는 반면 재화와 서비스 생산을 위한 투자에 들어간 은행 신용은 실질 성장에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은행신용이 자산거래에 쓰일 때다. 이는 종종 '거품과 붕괴'의 순환을 일으키곤 한다. 신용을 지나치게 확대함으로써 은행들은 자산 가격을 지속불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신용은 결국 둔화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가격은 붕괴한다. 뒤늦게 뛰어든 투기꾼들이 파산하면서 은행 부실대출 비중은 높아지고 신용은 더 줄어든다. 은행 보유 자산 가치가 10%만 하락해도 은행 시스템은 붕괴한다.

이런 과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책담당자들은 미래 은행위기를 막기 위한 조처들을 취할 수 있고 위기 이후 침체 상황을 더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우선 GDP에 기여하지 못하는 거래에 대한 은행 신용을 제한하는 것으로 출발해야 한다.

아울러 중앙은행들은 위기 상황에서 은행들로부터 액면가로 부실자산을 사들여 은행 대차대조표를 온전히 회복시키는 대신 신용 관리 의무를 지워야 한다. 다른 경제 부문에 신규통화가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2008년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택한 이 방법은 물가상승(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는다.

생산적인 은행신용을 자극하기 위해 그리고 재정정책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국채 발행을 중단하는 대신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한다. 이는 은행 신용을 지탱하고 수요, 고용, GDP, 세수 모두를 자극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지난 200년 동안 튼튼한 독일 경제의 중추 역할을 한 것과 같은 비영리 소형 은행 시스템을 설립해 전반적인 은행 서비스를 제공하고 중소기업에 대출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은행 부문을 더 활기차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은행 신용이 늘어날 때마다 일자리 역시 늘어나게 할 것이다.

경제에는 저축이 필요하다는 가정으로 오랫동안 혜택을 본 대형 다국적 은행들은 물론 이 같은 개혁에 저항할 것이다. 이들 은행은 수십년간 개발도상국들에 '외국의 저축'을 팔아왔다. 높은 금리와 외화로 대출을 했고 막대한 외국 채권을 축적했으며 이는 종종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이들이 공급한 신용은 지역 경제에 거의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반면 결국에는 이자와 급증하는 외국환 표시 채권을 통해 지역 자원을 빨아들이는 수단이 됐다.

개도국들은 외국 은행들을 축출하고 지역 금융기관들이 생산적 목적으로 통화를 창출하도록 해야 한다. 결국 미국, 독일, 일본, 중국처럼 성공적 경제 발전은 생산적 투자를 위한 국내 신용창출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카를 테오도르 구텐베르그 전 독일 경제장관

정리=dympna@fnnews.com 송경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