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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석학에 듣는다] 독일 경제의 신기루

송경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10.03 19:20

수정 2014.10.03 19:20

[세계 석학에 듣는다] 독일 경제의 신기루

독일 정부는 60년간 더 유럽지향적 독일을 지향해왔다. 그러나 지금 앙겔라 메르켈 정부는 유럽 경제를 독일의 이미지로 바꾸고 싶어한다. 이는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위험하다. 독일 경제는 볼프강 쇼이블레 재무장관을 비롯한 이들이 우쭐거리는 것처럼 유럽에서 가장 성공적 경제모델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독일이 세계적 명성의 기업들, 낮은 실업, 최고 신용등급 등 강점을 갖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임금 정체, 부실 은행들, 불충분한 투자, 낮은 생산성 증가율, 암울한 인구변화, 무기력한 성장세도 안고 있다.

독일의 '근린 궁핍화' 경제모델은-임금 억제를 통한 수출 보조- 다른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에 모범이 돼서는 안된다.

독일 경제는 지난 2·4분기 위축됐고,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고작 3.6% 성장에 그쳤다. 프랑스와 영국보다는 약간 낫지만 스웨덴, 스위스, 미국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성장률이다. 2000년 이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연평균 1.1%로 유로존 내 13위에 그쳤다.

1999년 유로 출범 당시 '유럽의 병자'였던 독일은 활력을 끌어올리는 대신 비용절감으로 대응했다. GDP 대비 투자는 2000년 22.3%에서 2013년 17%로 떨어졌다. 고속도로, 다리, 심지어 키엘 운하 같은 사회기간설비는 수년간의 관리소홀 끝에 엉망이 됐다. 교육체계도 삐걱거린다. 견습생 숫자는 통일 이후 최저수준이고 대졸자(29%)도 그리스(34%)보다 적다.

정체는 주로 독일 노동자들에서 비롯됐다. 15년간 생산성이 17.8% 높아지기는 했지만 임금은 실질 기준으로 1999년보다도 낮다. 당시 정부, 기업, 노조 3자는 임금에 재갈을 물렸다. 사측은 환호했을지 모르지만 임금 억제는 노동자들의 기능 개선과 기업의 고부가가치 투자 의지를 꺾어 경제의 장기 성장을 해쳤다.

임금 억제는 내수를 무너뜨리는 한편 독일의 성장동력인 수출에 보조금으로 작용했다. 의심할 바 없이 독일 마르크보다 훨씬 더 낮은 가치를 가지게 됐을 유로 역시 독일 수출품의 가격을 떨어뜨려줌으로써 도움이 됐고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통화가치 절하를 추구할 수 없도록 봉쇄했다. 유로는 최근까지도 남유럽 대외수요 붐을 이끈 한편 급속한 중국의 산업개발은 전통적 독일의 수출 수요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제 남유럽은 침체됐고 중국 경제는 성장 속도가 둔화되고 투자지출 경제에서 벗어나면서 독일의 기계류 수출도 감소했다. 전 세계 수출에서 독일이 차지하는 비중도 2007년 9.1%에서 2013년 8%로 떨어졌다. 독일이 통일 후유증을 앓으며 '병자'가 됐던 시절만큼 낮은 수준이다.

독일 정책담당자들은 지난 6월 현재 1970억유로(약 262조원)라는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독일 경제의 우월한 경쟁력이라며 우쭐대고 있다. 그렇다면 기업들은 왜 독일에서 투자를 늘리지 않나?

대외수지 흑자는 사실 병든 경제의 증상이다. 임금 정체가 기업 흑자를 늘리는 한편 지출을 줄이도록 만들고, 서비스 부문을 질식하게 만들며, 창업을 방해해 국내 투자를 위축시킨다. 흑자는 종종 외국에서의 낭비를 초래하곤 한다. 베를린 DIW 연구소에 따르면 2006~2012년 독일의 외국 자산 보유 규모는 6000억유로, GDP의 22% 줄었다. 설상가상 쇼이블레 장관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독일은 유로존 '안정의 닻'이기는커녕 불안정을 퍼뜨리고 있다. 독일 은행들의 까다로운 대출 기준은 자산가격 거품을 촉진했고 금융위기로 치닫게 했으며 그 뒤에는 채권 가치 하락을 불렀다.

임금 억제가 독일 경제에 미친 악영향을 감안할 때 다른 유로존에 임금 감축이 강제된다면 이는 재앙이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소득 감소는 국내 소비를 위축시키고 부채 관리를 더 어렵게 만든다. 글로벌 수요가 취약해 유로존 전체가 수출을 통해 빚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중국, 터키와의 경쟁으로 전통적 수출이 줄어들어 고통받는 남유럽 경제의 해법은 새롭고 더 나은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가치 체인을 끌어올리도록 투자하는 것이다.

독일 경제는 정비가 필요하다.

정책담당자들은 '경쟁력'이 아닌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하고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 정부는 제로수준의 금리 이점을 살려 투자를 늘리고 기업들, 특히 신규업체들에도 투자를 장려해야 한다.
끝으로 독일은 역동적 젊은 이민을 적극 받아들여 인구학적 감소세를 상쇄시켜야 한다.


필립 레그레인 런던 정경대 유럽연구소 객원 연구원

정리=dympna@fnnews.com 송경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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