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꼬끼오 예산, 올핸 없어질까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10.08 16:49

수정 2014.10.08 16:49

[곽인찬 칼럼] 꼬끼오 예산, 올핸 없어질까

우리나라 헌법 54조보다 더 처량한 법이 또 있을까. 당최 체면이 말이 아니다. 54조는 나라의 기틀을 잡는 헌법(憲法)이 아니라 헌 옷 할 때 헌 법인 모양이다. 54조 2항은 '국회는 새해 예산안을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의결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역산하면 12월 2일이다. 국회는 이를 밥 먹듯이 어긴다. 박정희·전두환 대통령 시절엔 잘 지켰다.
노태우 대통령 때부터 나쁜 버릇이 들었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정부 때 버릇이 더 나빠졌다. 박근혜정부 들어서도 국회는 유구한 전통을 잇고 있다. 작년엔 예산안을 올해 꼭두새벽에 처리했다. '꼬끼오 예산'이 따로 없다.

스스로 머쓱했던지 여야는 국회법을 바꿔 예산안을 제때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올해는 바뀐 국회법이 시행되는 첫해다. 개정안의 핵심은 두 가지다. 먼저 정부의 예산안 제출시한을 회계연도 개시 90일 전에서 120일 전으로 앞당겼다. 넉넉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다만 정부가 갑자기 한 달을 당기는 것은 어렵다고 하자 올해 열흘, 내년 열흘, 후년 열흘씩 앞당기도록 했다. 정부가 지난 9월 23일에 제출한 새해 예산안은 작년보다 열흘 이른 것이다.

그 대신 국회는 본회의 자동부의 시스템을 도입했다. 상임위원회가 11월 30일까지 예산안 심의를 마치지 못하면 자동으로 본회의에 넘기는 제도다(국회법 제85조의 3, ②항). 국회선진화법은 쟁점법안에 60% 룰을 적용한다. 여당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걸 막기 위해서다. 의장의 직권상정 권한도 제한했다. 그러면서도 예산안만큼은 예외적으로 본회의에 자동으로 넘어가도록 했다. 예산안의 법정시한 내 통과에 대한 의원들의 의지가 읽힌다.

뜻은 좋지만 글쎄, 과연 올해는 달라질까. 나는 부정적으로 본다. 국정감사가 끝나면 10월 말이다. 남은 한 달 동안 376조원 규모의 슈퍼 예산안을 처리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어정쩡하게 봉합된 세월호특별법은 시한폭탄이다. 여야는 특검후보 추천에 유족이 참여할지 여부는 추후 논의키로 미뤘다. 부동산 규제 완화, 담뱃값 인상 등 쟁점법안도 수두룩하다. 설사 예산안이 자동으로 본회의에 넘어가도 통과는 또 다른 얘기다. 헌법도 힘을 못 쓰는 곳이 대한민국 국회다. 국회법은 하위법에 불과하다. 새해 예산안이 12월 2일 이전에 처리될 걸로 믿는다면 순진하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정치권에 예산안의 법정시한 내 처리를 당부했다. 십수년째 들어온 말이지만 효과는 미지수다. 노무현정부 시절인 2005년 당시 변양균 기획예산처 장관이 의원들에게 e메일을 보내 읍소했다. 그해 예산안은 12월 30일 가까스로 통과됐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 야당이던 때다. 그나마 해를 넘기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최 부총리가 진심으로 예산안 조기 통과를 바란다면 더욱 바지런을 피워야 한다. e메일도 보내고 맨투맨 설득도 필요하다. 개정 국회법만 쳐다보다간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기 십상이다.

예산안 조기 통과가 왜 중요한가. 중앙정부가 지방정부·교육청에 예산을 배분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다. 한 해 예산에서 중앙·지방정부가 지출하는 예산의 비중은 6대 4 정도로 지방이 많다. 중앙에서 교부금·보조금을 받아 쓰는 지방정부는 국회가 미적거리면 자체 예산안은 아예 짤 수도 없다.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자체 예산은 국회와 중앙정부만 바라보는 천수답 예산이다.

재정 전문가인 고려대 김태일 교수가 소개한 구청 예산담당 공무원의 하소연을 들어보자. "근본적으로 국가(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예산 주기가 거의 같다는 데 불합리한 면이 있다. 국가의 재정지원, 보조금 등이 얼마나 내려올지 알 수 없다. 그 상태에서 예산을 짜면… 도중에 추가경정예산을 몇 번씩 다시 짜야 한다."('재정은 어떻게 내 삶을 바꾸는가')

늑장 예산은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눈에 보이지 않아 더 나쁘다. 그게 벌써 십수년째다.
이번에도 법정시한 내 통과가 안 되면 지방정부의 회계연도 개시를 3월로 바꾸든지 뭔가 수를 내야 할 것 같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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