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최경환의 뚝심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10.29 17:21

수정 2014.10.29 17:21

[곽인찬 칼럼] 최경환의 뚝심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1832~1883년)는 모던아트의 선구자로 꼽힌다. '올랭피아'(Olympia)가 그 분수령이다. 올랭피아는 몸을 파는 여자다. 그런데 창녀가 감히 비너스 여신의 자태로 벌거벗은 채 누워 있다. 몸매는 빈약하고 발에 걸친 슬리퍼는 꾀죄죄하다. 누가 봐도 풍만하고 아름다운 비너스 여신에 대한 모독이다.


더 괘씸한 건 관람객을 빤히 쳐다보는 올랭피아의 시선이다. 어둠을 틈 타 창녀촌을 어슬렁거리는 남정네들도 대낮에 창녀가 쏘아보는 눈길은 거북하다. 마네 이전의 창녀들은 불쌍한 죄인의 모습으로 구석에 쭈그러져 있어야 했다. 하지만 마네는 가식을 벗기고 현실의 옷을 입혔다. "올랭피아는 이제 미술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당시엔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문소영 '그림 속 경제학')

경제정책에서도 종종 마네와 같은 파격이 나온다. 1930년대 대공황이 발생하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수정자본주의를 들고 나왔다. 그는 시장실패의 치유책으로 정부 개입을 정당화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케인스의 충실한 추종자가 됐다. 거기서 뉴딜정책이 나왔다. 뉴딜은 예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자리 창출에 골몰하던 루스벨트는 우체국을 비롯한 공공기관에 벽화를 그리자는 제안에 무릎을 쳤다. 그 덕에 수천명의 화가가 일자리를 얻었다.

시장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정통파 경제학자들은 케인스 방식이 못마땅했다. 놔두면 시장이 알아서 할 텐데 정부가 끼어드는 바람에 일이 더 헝클어졌다고 비판했다. 정치인들은 케인스를 사회주의자로 깎아내렸다. 신자유주의 학파의 기수인 밀턴 프리드먼은 '샤워실의 바보' 이야기를 꺼냈다. 샤워꼭지를 온수에 맞춰놓고 틀어도 처음엔 찬물이 나온다. 이때 바보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지 못하고 수도꼭지를 온수 쪽으로 더 확 튼다. 그러다 뜨거운 물이 쏟아지면 이번엔 꼭지를 냉수 쪽으로 튼다. 프리드먼은 시장균형을 기다리지 못하고 냉·온탕을 오가는 정부를 바보에 비유했다.

이런 비판을 예견이라도 한 걸까, 케인스는 "장기적으로 우리 모두는 죽는다(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는 명언을 남겼다. 언젠가는 시장균형이 이뤄지겠지만 그 전에 내가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거다.

마네의 '올랭피아'
마네의 '올랭피아'

최경환 부총리는 케인지언에 가깝다. 한국 경제가 저성장·축소균형의 늪에 빠지기 전에 뭔가 수를 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재정·금리·부동산에 모조리 손을 댔다. 하지만 그런 최 부총리도 대공황기 루스벨트나 금융위기 때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의 파격엔 미치지 못한다. 최 부총리는 우체국에 벽화를 그리지도 않았고 윤전기를 돌려 돈을 찍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초이노믹스'를 헐뜯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일본은 어, 어 하다 저 꼴이 됐다. 궁극적으론 시장이 균형점을 찾아갈 거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는 다 죽는다. 보다 못한 아베 총리가 20년 만에 총대를 멨다. 이를 지켜본 최 부총리는 서둘러 발동을 걸었다.
초이노믹스를 한 번 화끈하게 밀어주면 어떨까. 최 부총리가 아니라 나른한 한국 경제를 위해서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한국 경제를 내맡기기엔 우리 수명이 너무 짧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네와 같은 파격 그리고 최경환의 뚝심이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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