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ELS 체험기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4.11.12 16:54

수정 2014.11.12 16:54

[곽인찬 칼럼] ELS 체험기

여윳돈이 생겨 은행에 갔더니 주가연계증권(ELS)을 권한다. 은행이 직접 만든 상품은 아니고 증권사 상품을 대신 판매한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쉽지 않았다. 기초자산이 코스피200 지수와 홍콩 HSCEI 지수 두 개라는 것, 6개월마다 정산해서 이자를 지급한다는 것, 두 지수가 동시에 일정 수준 아래로 떨어지면 최장 3년까지 지켜보다 이자를 지급한다는 것 등을 담당자는 열심히 설명했다. 연율로 따진 금리(기대수익률)는 정기예금보다 꽤 높았다. 물론 최악의 경우 100% 돈을 까먹을 수 있다는 말도 했다.


그리곤 한 뭉텅이 서류를 내민다. '설명 잘 듣고 잘 이해했다'는 칸에 자필로 서명하는 절차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다 나한테 불리하게 작용할 문서들이다. 경제신문 논설위원이라는 체면 때문에 건성으로 끄덕인 대목도 있지만 감은 잡았다. 생애 최초로 파생상품에 가입했다. 정기예금밖에 모르던 안정추구형이 초고위험 파생상품 투자자로 변신했다. 불안했지만 바닥을 기는 예금금리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6개월 뒤 은행에서 연락이 왔다. 두 지수가 기준가 대비 95%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ELS를 정산했다는 것이다. 원금·이자는 약속대로 입금됐다. 예금금리를 훌쩍 웃돌았다. 이것 봐라, 재미를 붙인 나는 그 자리에서 다른 ELS에 새로 가입했다. 이번엔 첫 6개월 동안 기준가 대비 85%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면 약속된 금리를 주는 상품이다. 첫 상품이 제시한 95%에 비하면 85%는 여유가 느껴진다. 코스피200·HSCEI 지수가 폭락만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그만큼 수익률은 낮다. 금융사들이 하는 일은 빈 틈이 없다.

초저금리 시대에 은행·증권 등 금융사들은 생존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기준금리 2% 시대에 4~5%대 수익률(지수형 ELS)이면 고금리다. 시중자금이 몰리는 건 당연하다. 저축은행·동양그룹 사태를 거치면서 투자자들도 한층 성숙해졌다. 금융 당국도 함부로 시장에 간섭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붐에 편승한 불완전판매는 막아야겠지만 심판관의 역할은 거기서 그치는 게 좋다.

사실 6년 전 금융위기가 터진 뒤 파생상품을 두둔하기란 쉽지 않다.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은 월가의 금융공학이 만들어낸 괴물이다. 하지만 그 뒤 월가에서 파생상품이 싹 사라졌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괴물은 처치됐고 파생상품 시장은 건재하다. 부작용이 두려워 금융 엔지니어들의 창의력를 말살하는 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다.

최근 ELS 쏠림을 우려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펀드 열풍을 떠올리면 그럴 만도 하다. 2008년 금융위기로 쪽박을 찬 투자자들이 어디 한둘인가. ELS 중에는 개별 종목을 기초자산으로 삼는 상품이 있다. '블루칩' 대형주가 포함된 ELS 가입자들은 요즘 맘이 편치 않을 게다. 실적 저하로 주가가 큰 폭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종목형은 지수형에 비해 기대수익률이 높다. 동시에 손해 볼 위험도 크다.

이게 파생상품 투자자의 숙명이다. 난 운이 좋은 편이다. 두번째 ELS 상품도 6개월 만에 조기상환됐다. 그렇지만 남한테 ELS 가입을 권유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ELS는 투자상품이다. 게다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파생상품이다. 투자는 궁극적으로 자기 책임이다. 2%대 저금리가 성에 안 차는 이들에게 ELS는 괜찮은 상품이지만 손해 볼 각오부터 해야 한다.

다만 불완전판매 방지책은 좀 손질하면 좋겠다. ELS에 가입하면 며칠 뒤 본사에서 확인 전화가 걸려온다. 충분한 상담을 받았는지, 원금손실 가능성을 아는지, 자의로 가입했는지 등 줄줄이 질문이 이어진다. 의례적이고 은행 편의적이다.
녹음용이란 느낌도 든다. 적어도 처음 ELS에 가입할 땐 두번 정도 상담을 받도록 하면 어떨까. 하루 이틀 생각해 본 뒤 결정을 내리도록 말이다.
그러면 내가 금융사 간 실적 경쟁의 '호갱'이 됐다는 기분이 덜 들 것 같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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