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학에 듣는다]

유로존의 안전망

또 다른 금융태풍이 유럽에 휘몰아치기 시작하던 10월 14일 룩셈부르크의 유럽사법재판소(ECJ)가 소집됐다. ECJ는 앞으로 수개월간 유럽중앙은행(ECB)의 무제한 채권매입(OMT) 정책이 불법이라는 독일 헌법재판소 판결을 심리하게 된다.

ECB가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 취약국가의 국채를 사들이기로 했던 OMT는 실제 매입 없이도 2012년 여름 공포에 휩싸였던 시장을 곧바로 진정시켜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가 "최근 통화정책 가운데 가장 성공적"이라고 자평할 정도로 유로존에서 가장 효과적인 위기관리 정책이었다.

10월 초 세계 경제둔화세 속에 독일 경제지표들이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그리스 국채에 붙는 위험 프리미엄은 급등했으며 ECB 통계는 투자자들이 이탈리아에서 자금을 빼내고 있음을 보여줬다. 유럽은 아마도 또 다른 시험에 직면한 것으로 보이며, 시니라오는 암울하다. ECJ의 심리는 이 때문에 더 중요해졌다.

물론 이번 태풍도 언젠가는 수그러들겠지만 또 다른 태풍들이 몰아닥칠 것이란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로존 경제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암울한 경제 전망에 직면해 있다. 성장 전망은 꾸준히 하강했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은 중단 없는(일부에서는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재정긴축에도 급증했다. 가계부채 부담은 줄지 않았고 이탈리아의 부채 증가, 물가 하락 악순환은 조만간 다른 유로존 취약 국가들이 맞닥뜨릴 운명이 될 것이다.

게다가 과감한, (독일만이 아닌) 유로존 차원의 재정확대와 대규모의 국제적인 유로 평가절하 공조 등의 성장 점화가 가능토록 하는 모든 정책대안은 배제된 상태다. 간단히 말해 유로존은 취약한 데다 의지할 안전망조차 없다.

독일 헌재와 ECJ 모두 ECB가 부도위기에 몰린 국가의 국채를 지원하는 것은 리스본조약 위반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이는 재정·정치 문제라는 것이다. OMT 프로그램의 주된 목적은 유로존 해체를 막기 위해서라는 ECB 주장은 독일 법원에 먹히지 않았다. 부도 직전 국가만이 통화동맹을 깨뜨릴 위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ECJ는 ECB에 OMT를 일부 완화할 것을 요구할지 모른다. 심지어 외르크 아스무센 전 ECB 집행이사도 '무제한' 매입 약속은 조약 위반이며 따라서 이를 제한해야만 한다는 독일법원 결정에 수긍했다. 결국 매입이 시작되면 시장은 ECB가 한계선을 그을지 여부를 알아내기 위해 시험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설상가상으로 ECB는 국채가 부도날 경우 ECB 역시 민간 채권자들과 함께 손실을 부담하겠다는 야심찬 약속을 한 상태다. ECJ가 이 조항을 뒤집으면 OMT는 생존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만약 ECJ가 OMT를 타당하게 해주는 법적 소견을 찾아내면-또 독일법원이 현재 금융불안에 민감하게 반응해 이를 마지못해 받아들인다면-그 모호성은 일단 제쳐둔 채 해결을 나중으로 미룰 수도 있다. ECB가 OMT에서 운용손실을 기록하면 독일(그리고 다른 회원국들)은 재정적·정치적으로는 훨씬 더 심각한 부담을 지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런 논의 가운데 어떤 것도 유로존의 구조가 안고 있는 근본적 맹점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유로존은 불완전한 통화동맹이며 각국은 통화주권을 포기했지만 재정적 실수를 함께 부담하는 것은 여전히 극도로 꺼리고 있다.

이 문제에 맞닥뜨리기를 꺼리면서 유로존 당국은 재정규정의 '유연성' 정도나 ECB의 모호한 자산유동화증권(ABS) 매입 같은 사소한 문제들에 천착하고 있다. 이들은 그러면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의 신조를 되뇐다.
"내일이면 잘될 거야(Tomorrow is another day)."

OMT 같은 재정적인 보증은 오직 이를 신뢰할 수 있을 때에만 시장 불안을 잠재우고 압력을 누그러뜨리는 식으로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신뢰가 없으면 요란하게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결과를 피하려면 유럽 지도부는 OMT 운용으로 발생 가능한 손실은 모두 분담한다는 점에 동의함으로써 OMT가 유로존의 효과적인 세이프가드로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정통성을 부여해야 한다.

아쇼카 모디 프린스턴대 윌슨 대학원 객원 교수 <정리=dympna@fnnews.com 송경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