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나루]

국제금융의 변화와 한국경제

지령 5000호 이벤트
지난달 29일 미국의 양적완화 중단 선언이 있은 이틀 뒤 일본의 대규모 양적완화 확대 발표가 있었다. 이를 두고 '이건 스텔스 공격이다.' 흡사 전쟁 때 최첨단 스텔스 전투기가 상대국의 레이더 방어망을 무력화한 뒤 일방적 공격을 가하는 것과 같다는 한 외국 전문가의 말이다.

최근 선진 경제대국들이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해 환율변동을 시키는 전통적 방법보다 대규모 양적완화를 통해 자국의 경제회복을 위한 수출 증대에 유리한 환율로 유도하는 통화정책을 비판한 것이다. 지난 6년 동안 미 연준의 3차에 걸친 양적완화로 인해 4조달러 이상이 풀렸다. 연준의 양적완화 정책은 일단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정책목표로 내걸었던 실업률은 2009년 9.6%에서 지난달 5.9%로 하락했다.

국내총생산(GDP) 증가율도 지난 2·4분기에 연율 4.6%라는 예상 밖의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1차 양적완화를 시작할 당시 800에도 못 미쳤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지수는 2000 선 안팎을 오르내리고 있다. 일본의 양적완화 확대 발표 후 세계 외환시장은 크게 동요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예상을 깨고 '통 큰' 양적완화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현재 60조~70조엔 규모의 국채매입을 80조엔까지 확대했다. 일본 경제는 지난 4월 소비세를 5%에서 8%로 인상한 이후 급격히 위축되는 모습이다. 최근 유가하락으로 아베노믹스의 최대 목표인 디플레이션 탈피가 어려워져 추가 양적완화가 필요했다는 일본 정부의 설명이다.

유럽중앙은행(ECB)도 일본형 장기침체를 우려해 1조유로(1450조원) 규모의 양적완화를 곧 실시할 것으로 보이며 중국 인민은행도 이미 시중은행들에 단기 유동성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세계 통화전쟁이 벌어지는 양상을 띠고 있다.

경제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선진국들 틈바구니에 낀 신흥국들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혼란스럽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내년에 예상되는 미국 금리인상에 따른 자본유출 가능성에 대비하고, 엔저로 인한 수출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적정 환율 수준 유지가 결코 쉽지 않다. 달러 강세, 엔화.유로화 약세 가속화가 전망된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원.엔 환율이 100엔당 950원으로 내려가면 수출이 4.2% 감소하고 900원까지 내려가면 8.8%나 급감할 것으로 예상한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내년에는 800원대 진입도 예상된다.

일각에서는 한국은행도 대폭적인 금리인하와 대규모 양적완화를 통해 원화가치를 떨어뜨려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연 2% 수준인 한국의 기준금리는 0%에 가까운 미국 금리보다 높지만 장기 채권은 미국과의 금리 차가 크지 않다. 원화가 국제통화가 아닌 데다 한국에 대한 리스크 프리미엄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미국과의 장기금리 차가 역전된 상황으로도 볼 수 있다.

신흥국에 풀린 달러가 이미 미국으로 회귀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큰 폭의 금리인하는 급격한 자본유출을 초래할 수 있고, 우리 경제의 잠재적 불안요인인 가계부채 관리에 심각한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 경제 활력을 찾기 위한 점진적 금리인하 수준을 벗어나면 안 된다. 안타깝게 우리는 미국.유로권 국가.일본.영국.스위스와 같은 국제통화를 발행하는 국가들이 하는 양적완화 정책을 시행할 수도 없다.


우리 경제의 내부요인이 대규모 자본유출의 빌미가 되지 않도록 최적의 통화.외환정책 조합이 중요하며 외국 투자자들의 신뢰를 잃지 않도록 가계부채나 기업부실 등의 단기적 리스크 관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앞으로 우리 경제의 대외환경 변화에 대한 노출을 줄이려면 내수확대 서비스산업 육성 등 장기 구조개혁과제 추진에 속도와 성과를 내야 한다. 국회에 계류 중인 서비스산업발전법 등 경제관련 중요 법안이 조속히 처리돼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윤대희 전 국무조정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