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식 칼럼]

빈곤이 대물림되는 사회

지령 5000호 이벤트
좋은 일자리 만들기가 해법.. '현대판 신분사회'로 고착화

중세까지만 해도 동서양 모두 신분 중심 사회였다. 법이 귀·천과 상·하를 갈라놓았고 그 신분은 대물림됐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중인·양인·천인으로 나눴다. 서민층인 양인은 양민·평민·상민·상인·서인 등 다양하게 불렸다. 이들은 주로 생산활동에 참여했고 국가에 대해 세금과 병역부담을 졌다. 그러면서도 양반관료 중심 통치구조 때문에 제대로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 이후 이런 신분제에 큰 변화가 생겼다. 농업·상업·수공업 발달로 부를 축적한 서민층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문학과 미술 등 양반사회를 넘나들었다. 족보를 사들여 양반으로 신분세탁하기도 했다.

세상이 다시 신분사회로 되돌아간 듯하다. 상류층(고소득층)·중산층·저소득층으로 분류된 현대판 신분사회는 물리적으로 신분 간 이동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점만 과거와 다르다. 요즘 한 번 빈곤층은 영원한 빈곤층, 빈곤의 악순환이라는 말이 나돈다. 빈곤층으로 떨어지기는 쉬워도 중상류층으로 오르기는 어렵다. 세상이 빈곤의 덫에 단단히 걸려들었다. 보건사회연구원이 최근 내놓은 보고서는 이런 세태가 반영돼 있다. 전국 7000여가구를 대상으로 벌인 '2014 한국 복지패널 기초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저소득층 5명 중 1명만이 빈곤에서 탈출했다. 8년 만의 최저치로 빈곤의 악순환이 심화되는 추세다.

2006년까지만 해도 3명 중 1명은 빈곤에서 벗어났다. 반대로 고소득층은 4명 중 3명이 계속 그대로 머물러 있다. 문제는 신분상승 여건이 더욱 악화되면서 신분사회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빈곤의 악순환과 함께 대물림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중산층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고소득층으로 신분이 수직상승한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 고소득층이 그 자리에 머물 확률은 계속 높아지고 있고, 고소득층에서 저소득층으로 추락한 경우는 8년 전에 비해 5분의 1로 줄었다.

이런 빈곤의 악순환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바로 고용시장 불안과 계층사다리 붕괴다. 고용불안은 현대판 신분사회를 고착화한 주범이다. 임시일용직은 대부분이 임시일용직을 전전하고 고소득자는 고소득자로, 고용주는 고용주로 계속해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내수침체와 수출부진으로 기업들의 호주머니는 더욱 가벼워지고 있으니 자연히 신규채용과 월급을 줄이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는 형국이다. 내수시장 침체는 임시일용직 일자리마저 갉아먹고 있다.

신분 상승을 위한 계층사다리가 기울고 있는 것도 한 요인이다. 1960∼1990년대만 해도 빈농가구 자녀나 빈곤계층 자녀일수록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신분 상승을 위해서다. 그래서 좋은 대학에 가고 사법고시나 행정고시에 합격해서 검·판사, 변호사나 일반 공무원이 된다. 임금이 높은 대기업에도 취업해 많은 사람이 신분을 끌어올렸다. 그때는 문호가 많이 열려 있었고 경로도 다양했다. 그런데 요즘은 공교육시스템이 무너지고, 학습평등권마저 실종되면서 학생 때부터 부에 의해 서열화되는 양상이다. 더구나 사법시험제 폐지와 국가고시 폐지 추진 등으로 신분상승 기회는 점점 줄고 있으니 이러다간 정말로 빈곤이 대물림되고 신분이 지배하는 그런 나라가 될까 걱정이 앞선다.

빈곤 탈피, 더 나아가 대물림을 막기 위한 특효약은 뭐니 뭐니 해도 질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다. 중소기업을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육성하는 것으로도 근로자의 신분상승을 이끌 수 있다. 이 모두가 경제성장과 기업의 활력증진에 달려 있다. 그런 만큼 정부는 무리한 복지지출에 힘을 소진하지 말고 고용을 정책의 제1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빈곤층·저소득층에 계층사다리를 다시 세워주는 것이고, 정부가 이들에게 해줄 최상의 정책이다.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 경제가 활성화되고 기업의 곳간이 가득 차면 자연스레 계층사다리가 복원된다. 세금도 많이 걷히니 나라 곳간이 두둑해져 더 많은 복지도 베풀 수 있다.

poongnue@fnnews.com 정훈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