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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질 권리‘ 법제화 필요한가

#. 국내 한 대학 학사 출신이지만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학력을 속인 A씨는 급기야는 10년간 국내 한 국립대학교에서 교수를 사칭했다. 이러한 화려한 스펙 덕에 A씨는 각종 저서를 출간하고 방송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학력과 경력을 사칭해 다수의 단체로부터 연구용역비를 가로채려다 덜미가 잡혀 징역형을 선고받은 A씨는 '잊혀질 권리' 를 주장하며 사건을 보도한 언론사에 실명 삭제를 요청했다.

최근 개인이 온라인 사이트에 올라 있는 자신과 관련된 각종 정보의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일컫는 '잊혀질 권리'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한창이다.

이 권리는 1995년 유럽연합(EU)이 만든 '개인정보 보호 규정 및 지침'에서 처음 등장했다. 하지만 한 스페인 변호사가 "검색창에 자신을 검색하면 빚 때문에 집을 경매에 내놓는다는 예전 기사가 나온다"며 관련 기사 링크를 삭제해 달라고 구글을 상대로 소송을 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계적으로 논란을 불러왔다.

이 사건에서 지난해 5월 유럽연합의 최고법원인 유럽사법재판소(ECJ)는 "기사가 사실이더라도 게시목적과 달라 부적절하거나 연관성이 떨어질 경우 삭제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며 해당기사 링크를 없애라고 판결, 잊혀질 권리를 인정하는 첫 판결을 내렸다.

아직까지는 전 세계적으로 이 권리에 대해 명확한 규정이나 구체적인 판례는 없지만 ECJ 판결에 따라 국내에서도 방송통신위원회가 이 권리에 대한 법제화를 검토 중이다. 그러나 법제화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은 크게 엇갈리고 있다. 개인의 권리 강화 차원에서 도입이 필요하다는 입장 못지않게 현 제도만으로도 개인의 사생활 보호는 가능하다는 점에서 불필요하다는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

■신상털기 방지 등 위해 법제화 필요

법제화 찬성론자들은 인터넷 발달에 따라 언제든 검색이 가능하고 이런 정보를 악의적으로 유포하는 이른바 '신상털기'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해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인터넷상에 영구적으로 기록이 남는 디지털 시대에 맞게끔 헌법상 개인의 행복 추구권이나 프라이버시 보호를 강화해 개인정보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논리다.

가령 재혼을 통해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연예인이 인터넷상에서 과거 이혼 기사가 계속 언급되며 현재의 가족에게 고통을 주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일반인이 한때 무심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글이 결혼이나 취직 등 인생을 발목 잡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20대 직장인 이모씨는 "과거 철없던 시절에 저질렀던 전과기록이나 부적절한 댓글 등이 평생 자신의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것은 그 사람의 사회적 재기나 정상적 활동을 막을 수밖에 없다"며 "관련법을 통해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 제도만으로도 충분..알권리 침해

반면 제도 도입 반대론자들은 이 권리가 헌법상 국민의 알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입장이다. 특히 공인에 대한 범죄행위 보도나 행적 보도는 그 자체로 역사적 기록에 해당하는 것으로 당사자가 '잊어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주부 오모씨(37·여)는 "아동·여성을 상대로 한 성범죄가 갈수록 늘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범죄를 저질렀는지 정보가 부족한 상황"이라며 "적어도 잊혀질 권리가 공인들의 숨기고 싶은 과거를 세탁하려는 수단으로 남용돼서는 안된다"고 전했다.

현재 마련된 제도만으로도 잊혀질 권리가 보장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개인정보보호법은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에게 개인정보 정정·삭제권, 처리정지 요구권 등을, 정보통신망법은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의 경우에 한해 해당 정보를 삭제할 수 있도록 각각 규정하고 있다"며 "별도로 잊혀질 권리를 제도화하면 개방성을 특징으로 하는 인터넷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mountjo@fnnews.com 조상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