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문재인의 197兆 꼬리표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02.11 17:04

수정 2015.02.11 17:04

'전면전' 대신 반성문 써야.. 공수표 남발은 여야 공통

[곽인찬 칼럼] 문재인의 197兆 꼬리표

"모든 곳에서, 언제나, 인간은 보수적이다." 유시민 전 의원의 말이다(국가란 무엇인가). 동감한다. 보수만 보수적인 게 아니다. 진보 역시 보수적이다. 원래 사람이 그렇다. 제 살던 대로 사는 게 제일 편하니까.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신임 대표가 취임 일성으로 "박근혜정부와 전면전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와 전면전? 불황으로 그늘진 사람들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정청래 최고위원은 한술 더 떴다. 그는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묘역 참배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독일이 유대인 학살을 사과했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히틀러 묘소를 참배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대개 신념은 좋은 것이지만 때론 아집으로 변질된다. 강경 보수도 무섭지만 대책 없는 진보도 경계대상이다.

전 브라질 대통령 룰라(재임 2003~2011년)는 달랐다. 룰라는 노조위원장 출신으로 브라질 노동당의 창당 주역이다. 4수(修)만에 간신히 대통령이 됐다. 세 번의 대선 실패는 룰라를 실용주의자로 만들었다. 그는 전 국민을 상대로 정치를 했다. 서민과 노동자는 물론 부자와 기업도 보듬었다. 퇴임 직전 룰라의 지지율은 90%에 육박했다. 정치인들에겐 꿈의 숫자다. 지금도 룰라는 전직 대통령으로서 나라 안팎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왜 우리는 룰라 같은 지도자를 가질 수 없나. 나는 문재인 대표가 한국판 룰라가 됐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당내 강경파들과 한판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룰라가 보수진영과 손잡자 불만을 품은 강경세력의 탈당이 속출했다. 그래도 룰라는 통합의 정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유권자들은 압도적인 재선과 브라질 역사상 유례없는 지지율로 룰라를 뒷받침했다.

문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외연 확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박근혜 후보는 경제민주화로 부동층을 파고들었다. 이를 경시한 문 대표는 쉽게 이길 수 있는 게임에서 졌다. 지금 새정치연합 지지율은 2·8 전당대회의 컨벤션 효과 덕에 30%대에 턱걸이했다. 하지만 이 정도론 부족하다. 새누리당과 맞먹는 지지를 확보하려면 더 많은 중도층을 끌어안아야 한다. 문 대표의 집권 로드맵에서 당내 강경파는 되레 걸림돌이다.

진보의 역량도 한 차원 높여야 한다. 노무현정부 이래 진보엔 무능이란 딱지가 붙었다. 문 대표도 이를 모르지 않는다. 그는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2011년)에서 "지금 집권을 말하기 전에 진보·개혁진영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알지만 딱히 달라지지 않았고, 그렇게 치른 2012년 대선에서 문 대표는 졌다.

역량은 사람이 가른다. 지금 문 대표와 새정치연합에 가장 부족한 자원은 인재다. 제왕학의 보고인 '한비자(韓非子)'에 이런 고사가 나온다. 춘추시대 진(晉)나라 평공(平公)이 집정대부 조무(趙武)에게 현령으로 파견할 적임자를 물었다. 조무는 형백이란 사람의 아들을 추천했다. 형백은 조무와 원수지간이었다. 평공이 "형백은 그대와 원수가 아니냐"고 묻자 조무는 "사사로운 감정을 공무에 들이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여기서 인재를 천거할 때는 원수도, 아들도 피하지 않는다는 고사가 나왔다.

'전면전' 취임 일성은 구태의연했다. 그 대신 반성문을 썼으면 어땠을까. 지난 대선에서 문 후보는 197조원짜리 공약을 내놨다. 박근혜 후보의 135조원은 차라리 초라하다. 증세 없는 복지도 허구지만 197조원짜리 복지공약 역시 에누리 없는 허구다. 반성문은 이랬어야 한다. "과거 제 대선 공약도 엉터리가 많았습니다. 저에게 표를 주신 분들께 미안합니다. 앞으론 지킬 약속만 하겠습니다."

대선 승패는 중도 부동층에서 갈린다.
진보와 보수를 자유롭게 오가는 거대한 물고기 떼를 제 어항 속으로 유도하지 못하는 한 대선 승리는 난망이다. 문 대표가 반성문으로 재기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면 나는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을 게다.
아쉽게도 문재인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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